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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箒星의 잔광
비처럼 내리는 별을 좇아 당신으로부터, 이카본이 마스터인 모르간의 막간 〈1〉 모르간은 편집증 증세가 있었다. 일반적인 편집증 환자와 모르간 르 페이 사이에서 보이는 차이점이 있다면, 모르간의 의심에는 마땅한 근거가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그녀 자신의 머릿속에서 털끝만 한 근거가 터무니없이 부풀고 오로지 최악으로 치닫기 좋도록 윤색될 따름이라, 결과적으로 모르간과 일반적인 편집증 환자의 증세는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자신이 하기로 정한 것은 몰아붙여야만 하는 부류의 사람에게 편집증 증세가 있다는 건, 정말이지 그녀의 관리자나 다름없는 이카본에게도 적잖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천문대에서는 내어놓고 모르간을 타기할 상대가 없다고 몇 번이고 설명한들, 실제로 설명한 후 당사자 또한 납득한들 소환된지 채 한 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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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은 에티카와 떠나며
이카본과 부친의 정부 모르간 눈이 오고 있었다. 싸라기처럼 흩뿌리는 것도 눈이 되다 만 언 비도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나 내릴 법한 함박눈이었다. 여자는 그런 날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현관으로 들어왔다. 양손에 하나씩 쥔 트렁크 두 개가 챙겨온 짐 전부였고 나보다 어렸다. 검은 리본으로 틀어 올려 묶은 블론드의 색이 정갈하니 고왔고 푸른 눈이 자못 사랑스러워 보이는 여자였다. 때때로 성인이 되어가며 색소가 옅어진다는 사람이 있다더니 여자 또한 그럴는지. 벌써 블론드 끝이 희끗하게 흐려지는 듯했다. 그조차 백금처럼 창백하게 빛나 정갈하다는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집안 곳곳을 바삐 둘러보느라 애석하게도 그 눈은 또렷이 지켜볼 수 없었지만 입매가 단정해 싱그럽게 웃으면 퍽이나 어울릴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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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맹세
스왑AU의 이카본과 모르간 ……지금 이 순간, 당신께서 복수 같은 것은 생각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허나 신은 늙어 근심만 늘어가고 눈은 천식賤息보다 어두워 천식이 당신께 본 것을 보지 못하나이다. 천식도 아직 어려 신이 보고 예감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지요. 그리하여 신은 근심하고 또 근심하나이다.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당신께서는 지금 같은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으십니까. 복수심이란 것은 눈 덮인 칼과 같아서, 서릿발 같을 때 감추어져 있고 안락할 때 녹아 기승을 부리지 않습니까……. 며칠 전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버밀리온의 영주는 대답지 않는 모르간 앞에서 그 많은 말을 주워섬기다 돌아갔다. 애당초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의무에 쫓기듯 서한으로 전하고 다시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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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드스턴 3가 오트 쿠튀르 아틀리에
추밀원장이 여왕마마 옷 맞추는 놀이에 한 해 연봉 다 털어넣는 이야기 여왕의 점막에 장미를 틔운 세계(장편)의 프롤로그로 사용되었습니다. “설마 오늘 같은 날도 공무에 매달리고 나는 분신이랑 내보낼 줄은…….” “기억은 동일하고, 근본적으로 개체차는 없다. 돌아온 후에도 본체에 인계는 될 테지. 뭐가 불만인 거냐?” 그 자리에 앉으면 다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니? 이카본은 문득 목까지 치받쳐 올랐던 말을 삼키듯 조심스럽게 제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모르간의 눈에도 보일 수 있을 만치 분명하게, 그리고 조용히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리고 나자 이카본은 슬 시선을 피했다. “아니, 뭐랄까. 당신은 왠지 그때 가서 생각하겠다고 말하고선 막상 그날이 되면 일이 바쁘니 약속은 취소하자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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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어의 체온
체온은 신음처럼 고요하고 낯설고 버거워서 “크리스마스로즈로군.” 묻지 않았을 때 음성이 흘러나오기는 처음이었다. 창백하고 핏기없는 입술이 움직이며 뜻 없는 음절로, 형태소로 발음되는 것을 바라보며 이카본은 눈만 굴려 화장대 주위를 살폈다. 오늘의 장식은 갖은 색을 입힌 수국과 흰 매그놀리아였다. 색색이 주는 인상이 화려했으나 각각의 색은 깊지 않고 호화롭지 않아 눈이 피로하지 않은 꽃들이었다. 그러므로 향 또한 장미수와 섞였다 해서 어지럽지는 않을 터인데. 이카본은 다시금 화장대에 등을 기댄 채 앉은 모르간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으나 잠시였고, 모르간은 느리게 눈을 감을 따름이었다. 투정을 부리는 성격이었대도 염려스러웠을 테지만 별다른 말이 따라오지 않아 염려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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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불신자와 사랑하는 불신자에게
범인류사의 손님과 브리튼의 여왕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의 개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기댈 수 없으며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르간 르 페이에게 신이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무의미해진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이면 그녀는 무엇에 이끌린 신도처럼 카멜롯 성탑 가장 높은 곳을 찾아가 뜻 모를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한들 또 다른 오늘을 연명하는 게 고작인 그녀의 브리튼을 돌보고 기도를 경청해줄 신은 이미 없었다. 모르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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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점막에 장미를 틔운 세계
추밀원장과 여왕이 맞는 요정국 브리튼의 아침 추밀원 의장은 체면이라는 것을 몰랐다. 사리분별 못하는 요정들조차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오래된 격언을 증명하려는 양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고 난 후 얼마간은 어울리지도 않게 새 기관을 제시한다든지, 으스대며 평의회 한참 전부터 궁정 회랑을 돌아다니며 기운을 뺐음에도 어제 갓 새로 설립된 추밀원 의장 자리에 앉은 이는 도통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자명했다. 아침 일찍 어전에 들기 전 보고 갈까 싶어 찾았을 때 아직도 테이블 앞에 앉은 채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쥐고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손수 의장직을 내린 여왕이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모르간은 팔짱을 끼며 못마땅하게 눈썹을 추켜올렸다. 머그컵에 담긴 커피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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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로湛露
요정국의 아침은 들어오는 햇빛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찌푸렸다가 잠에서 깨는 아침과는 연이 없었다. 해가 떠오른 시간 내내, 하늘은 금세라도 다시 해가 저무는 황혼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홍빛으로 물들었고 햇빛은 옅게 가물거렸다. 덕분에 수면을 위해 눈을 가릴 일도 없어 밤이 늦도록 침대에서 램프 빛에 의지해 책을 읽다가 까무룩 잠에 빠지곤 점심 가까운 오전 중에나 일어나는 일이 일상이었다. 요정국의 카멜롯에 머무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카본에게 으레 궁정의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 아홉 시 기상은 이른 기상 축에 들었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그 어떤 자극도 없이 천천히 눈은 뜨였다. 익숙한 자색 천개나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미미한 소음 대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모르간이 침대맡에 앉아 이카본을 내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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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잘 아는 이방인처럼 우리는
요정국 브리튼, 이카본과 모르간의 티타임 “홍차든 커피든 근본적으로 음료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대화를 위해서는 티타임을 구실로 삼고, 티타임이니 마땅한 음료를 고를 뿐. 결과적으로,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미각 없는 자들이 가질 법한 지론이구나. 같은 것을 마신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당신이 중요시하는 디테일은 어떤 거지?” 테이블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모르간은 포트 앞에 서 있는 이카본을 넘겨다보았다. 호리호리한 몸에 품이 넓은 셔츠를 걸치고 있으니 이따금 어깨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 보일 뿐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라인더에 간 원두를 서버에 올리고 덥힌 물을 따르고 있는 모양이리라고 넘겨짚을 뿐이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창을 낸 문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