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잘 아는 이방인처럼 우리는

요정국 브리튼, 이카본과 모르간의 티타임

 

 

　“홍차든 커피든 근본적으로 음료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대화를 위해서는 티타임을 구실로 삼고, 티타임이니 마땅한 음료를 고를 뿐. 결과적으로,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미각 없는 자들이 가질 법한 지론이구나. 같은 것을 마신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당신이 중요시하는 디테일은 어떤 거지?”

　테이블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모르간은 포트에 서 있는 이카본을 넘겨다보았다. 호리호리한 몸에 품이 넓은 셔츠를 걸치고 있으니 이따금 어깨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 보일 뿐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라인더에 간 원두를 서버에 올리고 덥힌 물을 따르고 있는 모양이리라고 넘겨짚을 뿐이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창을 낸 문틈으로 선선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맞은편에 내려놓은 책장이 책갈피를 덮으며 몇 페이지 넘어가고, 발코니를 넘어 방 안을 한 번 가볍게 휘젓고 난 후에야 밀려나가면서 포트로부터 향을 싣고 나갔다. 헤이즐넛과 과실의 향을 모조한 원두였다. 그라면 아마 진짜 헤이즐넛을 더했겠지. 모르간은 건조하게 이카본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찻잔의 무결함.”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이라면 결코 모르간 르 페이를 독살한다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라 해도 동일할 것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그릇된 일을 행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므로. 그러나 모르간은 그것을 가리켜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동의어였다. 그녀는 이카본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들릴 듯 말 듯, 책장에 가 닿을 정도로만 희미하던 음성이 나온 후로 방 안은 오랫동안 고요했다. 포트는 이미 커피를 모두 내린 지 오래였고 마땅한 디저트까지 고른 후였으므로 그리 뜸을 들일 이유가 없었음에도. 맞은편에 놓인 책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모르간이 마침내 다시 고개를 돌려 이카본을 바라보자, 그는 어느새 그녀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고 있었다.

　“그럼 직접 고르게 해줄게. 이리 온.”

　기도 안 차는 말이었다. 검은 베일 아래서 단정한 입매가 꿈틀거렸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웃는 것 따위야 무시할 수 있었으나 정말이지 번번이 열여섯 살 아이를 대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모르간은 그를 쏘아보았으나, 한숨을 내쉬고선 테이블에서 일어나 이카본에게 다가갔다.
　이카본은 모르간이 곁으로 다가오자 그녀의 묵인 아래 채워질 수 있었던 찬장을 열었다. 찬장의 첫 칸부터 가장 아래 칸까지 모조리 다른 쌍과 다른 목적으로 빚은 잔이었다.
　모르간은 이카본이 수집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범인류사로부터 흘러들어온 유실물 가운데 도서류는 그다지 값이 나가지 않는 종류였고 티 세트 또한 보석에 비하면 고가품의 비율이 현저히 낮은 물품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소지한 것과 같은 것은 수집하는 법이 없었다. 유실물 가운데 도서류와 자기류는 모조리 그에게 보내라고 한들, 중복된 것은 모조리 선별해 되돌려보내는 일 정도만 알았을 뿐 구체적으로 무엇을 수집하는지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흰 도자기에 음각으로 무늬를 세공해 구운 것, 립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선이 매끈한 데미타세, 찬 음료를 위한 투명한 크리스털, 검은 염료를 바른 머그컵, 황금을 녹여 켈틱 매듭을 그린 것까지. 모르간은 찬장에 가득 늘어놓은 잔을 올려다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모양새와 형태를 용도에 따라 달리해 분류하는 건 오로지 인간뿐이리라.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철저하게 기호품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작법에 따른 찻잔을 내오는 요정들 또한 결코 그 필요성을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을 테고 그녀 또한 요정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세월 동안 어떤 찻잔에 어떤 음료를 내오는지 따위는 중요시하지 않았다. 찻잔의 바닥에 독을 바르지 않았다면, 음료의 풍미로 비소를 고르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모르간 르 페이는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매일같이 공들여 닦으며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을 쉬이 떠올릴 수 있을 듯싶었다.
　한참 만에야, 모르간은 손을 뻗어 투명한 크리스털 잔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조차 없는 데다가 누가 보아도 뜨거운 음료를 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 또한 그녀의 것이 아닌 기억 속에서, 이 잔에 얼음을 담고 브란데 웨인을 따르며 한가로이 속살거리던 시간을 익숙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대화의 어떤 한가로움, 알코올의 어떤 넉넉함, 청량한 얼음의 어떤 소음 모두를 그 잔은 간직하고 있었다.

　“이걸로 하지.”

　손 안으로 잠겨 드는 크리스털은 장갑 너머로도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온도는 쉬이 전달될 것이고 쉬이 번지리라 확인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째서인지 일부러 그러고 싶어졌다. 유아적인 심술이라도 난 것처럼. 모르간이 고개를 돌려 이카본을 바라보자, 이카본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자그맣게 웃고 있었다. 그는 몹시도 그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좋아, 그럼. 나도 그걸로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