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점막에 장미를 틔운 세계

추밀원장과 여왕이 맞는 요정국 브리튼의 아침

 

 

　추밀원 의장은 체면이라는 것을 몰랐다. 사리분별 못하는 요정들조차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오래된 격언을 증명하려는 양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고 난 후 얼마간은 어울리지도 않게 새 기관을 제시한다든지, 으스대며 평의회 한참 전부터 궁정 회랑을 돌아다니며 기운을 뺐음에도 어제 갓 새로 설립된 추밀원 의장 자리에 앉은 이는 도통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자명했다. 아침 일찍 어전에 들기 전 보고 갈까 싶어 찾았을 때 아직도 테이블 앞에 앉은 채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쥐고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손수 의장직을 내린 여왕이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모르간은 팔짱을 끼며 못마땅하게 눈썹을 추켜올렸다. 머그컵에 담긴 커피는 아직도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미적지근해질 만치 시간이 오래 지나지도 않은 듯싶었다. 오히려 이렇게 일찍 일어난 자신을 스스로 뿌듯하게 여기지나 않았을지. 그녀는 구태여 묻지 않아도 이미 그를 모두 알았다.

　“그런 불성실한 태도로 어떻게 현자 노릇을 한 거지.”

　……후아아…… 냉랭하게 던진 말에 나른한 하품 소리가 돌아왔다. 느긋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카본은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했다. 그는 항상 아침이면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표층부에 드러난 말만을 따질 수 있는 듯했고 깊은 함의 따위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얼빠진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아르토리아가 그래서 항상 출근 시간 늦춰줬었어…… 그래도 퇴근은 늦게 했지……. 아…… 커피 마실래……?”
　“……어처구니가 없군…….”

　모르간은 이카본의 손에서 머그컵을 가져갔다. 순순하게 그녀에게 잔을 내주고도 아직 잠기운에 취해 헤매고 있는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붓자, 의장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나고 말았다. 아연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모르간은 태연하게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았다.

　“가서 몸이나 씻고 와라. 조반은 여기서 들 셈이다.”

 

*

 

　“당신도 가끔은 아침을 와플로 해보는 건 어떻니? 갓 구운 와플에 딸기절임을 얹으면 과실의 가공에 관해선 생각이 좀 달라질지도 몰라.”

　생각지도 않았으나, 모르간은 그녀의 연인이 그녀에게 얼마나 순종적인 연인인지 재확인받고 말았다. 기실 그녀의 머릿속에선 단장을 마친 이카본이 테이블에 앉기도 전부터 잔뜩 토라진 투로 조금 너무했다느니, 커피가 조금만 더 뜨거웠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라느니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보다 덜한 반응을 예상했다 한들 지금처럼 헤실거리는 이카본이란 모르간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러나 익숙해져야 할 일이라면, 익숙해지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모르간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카본이 내렸던 커피를 기울이며 테이블 맞은편을 건너다보았다. 잔에는 커피 대신 뜨겁고 진한 초콜릿, 접시에는 시럽을 잔뜩 뿌린 팬케이크며 생크림 얹은 와플. 하나같이 그녀라면 고르지 않을 메뉴였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양 입을 열었으나, 곧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입술을 축인 잔만 내려놓았다. 이쪽으로 건너오는 시선을 그녀 또한 느꼈으므로.
　실제로 이카본은 제법 흥미롭게 맞은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콩소메라 보아도 무방할 만치 묽은 포타주와 흰 빵, 잘 깎아둔 사과 몇 조각이 아침의 전부였다. 전해듣기로 임금은 자주 아침을 걸렀고 시종들 또한 임금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애당초 섭식이 문제가 되는 종자들이 아니었고, 임금 또한 그랬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해줘서 온 거니?”
　“그랬으면 하는 건가?”

　이카본은 생긋 웃었다. 그는 졸라서 얻을 것이 있는 때와 조르지 않아 얻을 것이 있는 때를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 타인의 호의를 얻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먼저 호의를 주면서 자연스레 그 반대가 몸에 밴 이에게서 으레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더 이상 말을 기대할 수는 없을 터였다. 모르간은 덕분에 언짢은 것처럼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스푼을 들어야 했다.
　묽은 수프를 젓는 스푼은 느리게 움직였다. 까탈스러운 범절의 범위에도 어긋남 없이 그녀가 쥔 스푼은 그릇을 긁는 일 한 번 없이 조용하게 움직였고 가까운 것의 내용물을 멀리까지 옮겨갔다. 이따금 잔이나 나이프 따위가 딸깍이는 소리가 들릴 뿐, 사위가 고요하던 차에 모르간은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만하면 조찬을 준비하라 내려둔 영은 체면치레를 마쳤을 터였다.

　“너를 데려온 범인류사의 천문대는 멸망했고 내가 직접 영지를 내리며 정부라 했던 인간도 그에 휘말려 죽었다. 내 주위에 이제 인간은 너뿐이다. 그런데 네게 나는 권세를 주었으나 영지는 주지 않았어. 너를 곁에 두고, 대사 서른 명 씨족 일곱 명 누구도 언감생심 탐내지도 못했을 자리를 오로지 너만을 위해 새로 설립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후후, 고양이 쥐 생각해주시는 기분이 아직도 드는군. 이제 와 요정들이 나를 업신여길 거라 생각했다면 서임 전 고려했어야 하지 않을까?”
　“업신여기는 것과 질시하는 것은 다르다. 그것들은 어제 죽고 오늘 살아난 몸으로 네가 하는 말, 걸음하는 곳, 행동거지 하나까지 모조리 나와 연관지어 생각할 거다. 나는 바로 어제 이 땅에 남을 자와 떠날 자를 가려 뽑았다. 네가 왜 이 땅에 남을 자가 되었는지 그들은 네가 아닌 나로써 판단하려 하겠지.”

　말이 이렇게까지 길어지리라 생각지 않았는지, 모르간은 잠시 손끝으로 제 이마를 문질렀다. 입안에서 음성은 맴돌았고 군더더기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하는 듯싶었다. 설마, 눈앞의 상대가 그런 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부러 듣고 싶어하고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유아적인 체질만 아니라면.

　“……어쨌거나 그렇다. 너를 자유롭게 놓아둘 작정이 아니라면 당분간은 너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옳다. ‘내가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 또한 당분간 겉치레에는 신경써야 할 터.”
　“후후, 다정하다고 자화자찬해도 괜찮았을 텐데.”

　그녀는 대답지 않았다. 이카본이 접시에 남은 것을 먹는 동안 그녀는 진하게 내린 커피만 몇 번 홀짝거렸고 손이 움직이고 음식을 덜어내어 입으로 가져가는 과정 모두를 지켜보았다. 눈을 떼지 않았으나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허락한다면, 때때로 이카본은 꼭두새벽에라도 일어나 모르간과 식사를 함께하고 싶어졌다. 문득 그녀가 며칠 전 들었던 만찬을 떠올리면서.
　모르간이 들던 만찬은 풍성하되 포만이 없었다. 접시가 비칠 만큼 얇게 저민 송아지 혀와 생 트러플을 올린 카르파치오, 푸아그라와 함께 삶은 송아지 대퇴골의 골수에 양송이 덕셀을 얹은 파피요트가 메인디쉬 전부였다. 허기를 채우지 않아도 될 요정이, 위정자가 보일 법한 종류의 사치스러운 정찬이었다. 그녀의 사치는 효율적이었고 과시하기에 알맞았다.
　먼 기억 속에서, 모르간은 어느 쪽인가 하면 그녀 스스로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귀한 것을 보면 탐냈고 유일한 것을 보면 필요가 없더라도 손을 뻗어 쥐고 싶어 안달 내는 부류를 정의 내린다면 곧 모르간 르 페이였다. 이제는 무용해진 구분이련만 이카본은 때때로 그 모든 것을 추억하듯 따라갔다. 원했으므로 만찬을 취하는 자와 원함과 원하지 않음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탈각된 자 모두를 그는 사랑했고, 이제는 온전히 그가 손에 쥔 상대였으므로.

　“항상 고마워, 모르간.”

 

　모르간은 눈썹을 꿈틀대었다. 그녀는 항시 그랬듯 이카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시선을 쏘듯이 던졌고 띤 색은 형형했다. 홍채의 색이 선명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형형하게 빛날 수 있는 색이란 흔치 않았다.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이 몇 번이고 거듭해 말할 만큼 정말로, 정말로 아름다운 색이었다.
　이윽고 눈동자가 매끄럽게 아래로 굴러내려갔다. 잔은 여전히 그녀가 고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취향에 모자람 없는 잔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녀는, 늘어지는 나른한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파고들어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상아탑의 남자가 싫지 않았다.

　“……그런 말은 오후에 다시 재고하도록 하라. 나의 현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