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로湛露

　요정국의 아침은 들어오는 햇빛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찌푸렸다가 잠에서 깨는 아침과는 연이 없었다. 해가 떠오른 시간 내내, 하늘은 금세라도 다시 해가 저무는 황혼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홍빛으로 물들었고 햇빛은 옅게 가물거렸다. 덕분에 수면을 위해 눈을 가릴 일도 없어 밤이 늦도록 침대에서 램프 빛에 의지해 책을 읽다가 까무룩 잠에 빠지곤 점심 가까운 오전 중에나 일어나는 일이 일상이었다. 요정국의 카멜롯에 머무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카본에게 으레 궁정의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 아홉 시 기상은 이른 기상 축에 들었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그 어떤 자극도 없이 천천히 눈은 뜨였다. 익숙한 자색 천개나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미미한 소음 대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모르간이 침대맡에 앉아 이카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카본은 잠에 취해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언제부터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항시 꿈을 그리며 잠들더니 이제는 깨어서 꿈을 꾸는가, 의문과 방백은 한데 뒤섞여 뭉글대는 졸음과 함께 다시 잠겨 들었다.
　이카본은 느릿느릿 손을 뻗어 베일을 걷었다. 제 신부라도 되는 것처럼 손길은 자연스러웠고 손끝에 닿는 살갗은 서늘했다. 검은 베일 너머에서 덩이져 흐릿하게만 다가오던 피사체가 노곤하게 남아 있는 졸음 속에서도 선명해졌다. 지척에서 보았을 때조차 공들여 쌓은 화장이 아직 선명한 것을 보면 단장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지가 번지지 않은 입가로 손가락 끝이 잠시 닿았다가,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움직임과 함께 베일이 다시 얼굴 위로 떨어지는 소리와 이어지는 말 사이를 벌린 틈이 길었다. 다시금 눈을 감아 금세라도 잠에 빠져들 듯 느른하게 음성은 흘러나왔으나 잔뜩 묻어나던 졸음은 한 꺼풀 가신 태가 났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씨족 회의가 취소되었다. 아직도 자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여전하군.”

　모르간에게 생각을 설명하는 일은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낭비였고 그녀는 필요한 낭비와 필요하지 않은 낭비 사이의 사치를 구분하곤 했는데, 불필요하다 규정한 군더더기를 항상 이카본에게는 필요한 것처럼 잘라내어 내놓곤 했다. 그러므로 한숨이 뒤따르지 않아도 내어놓고 한심하게 여길 수 있는 말씨가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단정한 음성이 다소 잠긴 듯한 것을 보면 아마, 모르간은 오늘 처음 입을 뗐을 터였다.
　이카본은 여전히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은 채 꾸물거리며 돌아누웠다. 그는 언제 잠에서 깨건 기상 후 루틴이 한결같아 느릿느릿 일어나 앉아 시계를 보고, 맨발을 슬리퍼에 꿰어 포트까지 비척비척 걸어가 홍차나 커피를 고르곤 했다. 잠에 취한들 깨어서도 여전히 침대에서 는적거리는 일은 드문 편이었다. 오늘은 그 드문 내방에 맞추어 드물게 굴고 싶었다. 이카본은 모르간의 장갑 낀 손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며 자그맣게 어깨를 떨며 웃었다.

　“일정이 취소되고서 여길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한 거, 조금 영광스러운지도 모르겠어.”
　“…….”
　“알잖아…… 당신은 나 자는 것만 보다가 갈 수도 있었는걸.”

　모르간은 대답지 않은 채 제 손에 묻힌 이카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 그대로 되었을 일일랑 생각할 이유가 없었음을 구태여 지적하지 않을 셈이었다.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은 마치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사람처럼, 한밤중이라 한들 모르간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적마다 잠에서 깨어 예의 희끄무레한 웃음을 지었으므로.
　표정 없이 매끄럽던 모르간의 얼굴 위로 잠시 파문이 일었다가 스러졌다. 주어지지 않을 것이 주어진 자가, 그리 정해진 것처럼 사랑하는 이를 마주했을 때란 그 얼마나 역설적인 말이었는지. 모르간은 존재하지 않은 사실과 존재해야 할 의견 사이로 파고든 간극을 칼로 치듯 잘라낼 수 없었다. 잘라내도 잘리지 않을 것은 아니련만, 그녀는 그것을 구분하고 분류하는 종류의 개체가 아니었다.

　“더 큰 영광을 줄까?”

　그제야 이카본은 슬그머니 눈을 떠 모르간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녀는 이름으로써 호명될 때의 눈길과 그렇지 않을 때 주는 인간의 눈길을 오롯이 구분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명시가 오만한 정의가 아님을 확인받을 수도 있었다. 이카본이 주는 저 확신은 모르간에게 있어 지나칠 정도의 명료성 자체였다.
　모르간은 저 스스로 베일을 들추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이처럼 관을 내려놓았다. 가벼이 고개를 숙이고선, 이카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숨을 나누지 않았고 시트를 짚은 손에 잠시 체중이 실렸을 뿐 그뿐이었다.
　요정국의 아침은 들어오는 햇빛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찌푸렸다가 잠에서 깨는 아침과는 연이 없었다. 해가 떠오른 시간 내내, 하늘은 금세라도 다시 해가 저무는 황혼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홍빛으로 물들었고 햇빛은 옅게 가물거렸다. 해가 뜬 이상 시간의 흐름은 알 수 없을 만치 고요했고, 하늘은 변하지 않았다. 범인류사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은 빠르고, 청량하고, 소란스러운 색에서 명료함만을 취하며 불멸하는 것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