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류사 브리튼 (DEC~, 2023)

유년의 뜰

 
1.
수녀원에서 살던 시절의 범인류사 모르간.
그녀는 수녀원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었다. 서원하지 않아도 온갖 사유로—심지어 모르간이 겪은 일과 같은 사유로—수녀원에 머무르는 여자들은 없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수녀원에서 진짜 ‘왕의 딸’은 오로지 그녀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모르간은 수녀원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어봐야 수녀원의 귀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어느 지체 높은 도련님이 수도사들과 함께 금남구역 바깥에서 필사본을 받으러 방문한다는 말도, 세속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던 책들을 갖고 찾아왔다는 말도, 그로 인하여 모르간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그녀는 마치 신처럼 걷고 계명성처럼 말한다던 소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생각만으로도 부아가 치미는 듯해 그녀는 버밀리온의 이카본이 방문 일정을 잡는다고 할 적이면 일주일 전부터 분을 삭이느라 올리지도 않던 기도를 올려야 했다. 귀에 닿지 않는 신의 말을 입에 배지 않는 신의 간구를.
새벽의 기도가 끊어져버린 날 모르간은 창문을 연다.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 이카본은 아침 일찍 깨어난 게 힘에 부쳐 꾸벅꾸벅 졸다가도, 잠을 깨려는지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는가 어느 비 내리는 밤 그대의 처마 밑을 누가 울고 가는지, 멀어지는 흥얼거림 속에 모르간은 물끄러미 이카본을 내려다본다.
그는 평생 그렇게 싱그러울 것이다. 모르간에게는 안 된 일이다. 이카본에게도 안 된 일이다.

2.
오멘 찍던 시절의 어린 이카본은 확실히… 데미안처럼 음험하고 조용한데 싸아…한 느낌이지 범몰간처럼 기분이 널뛰는 정서불안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 같음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사람 계단에서 밀어 죽일 것 같은 뜻 모를 불길함과 총명함 사이로 툭 툭 불거지는 위화감 같은 것… ‘왜 그러면 안 되느냐’적인 눈길과 병색이 엿보이는 안색이 합쳐질 때의 음험한 기운… 그것들이 전부 목숨처럼 아끼는 외아들을 기이하게 느끼게 했지만 그냥… 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변화가 보인 날 그들의 부모가 더없이 기뻐했을 것 같다고 짐작할 뿐이다
본디부터 이카본의 집안은 손이 귀한 편이었고 이카본의 어머니는 병약해 그를 낳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으므로 아들 셋을 죽여도 아들 셋이 남았다는 식의 대안도 없었고
2-1.
그런데 이카본 그랬…던 건 사실 아르토리아도 알고 있었을 것 같아🤔 이카본이 아르토리아가 여자란 걸 알고 있던 것처럼…
뭐 오멘 찍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전생애를 함께하다시피한 친구였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미묘하게 애가 싸한 게 교정ing중이었을 시점이었을 것 같고

@드림주가 어렸을 때 육아 난이도는 어땠나요?
말을 안 듣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정말로, 이카본의 부모는 그를 제대로 양육하고 교육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쏟아야 했다.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악한 성향을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사랑하고 지도한다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그의 천성은 현재의 범인류사 모르간에게 ‘동족’이었지만 자라나면서 브리튼에 절대선을 구현하려 했던 교만한 지식인 상아탑의 현자가 되었고.
그것 외에는 항상 부모 말 잘 듣고 책 읽는 거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였음

@어린 드림주가 지금 드림캐 만나면 삭았다고 생각할까요 취향폴인럽일까요
어린 나이에 이미 어린 시절의 모르간이나 비비안은 좀… 하고 거리두기했을 거라 와아…… 저런 아이가 된다고?(오히려 좋아)

@드림주에게는 흉터나 상처가 있나요? 만약 있다면 그걸 지우고 싶어하나요, 내버려 두나요?
어릴 때 병약해서 우서 펜드래건이 궁정마술사들은 다 보내줘서 치유해줬고 범몰간은 이것 때문에 이카본을 진심으로 미워하게 됐다는 설정이 있었다가 없었다가 합니다
내버려뒀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는데 모르간의 눈에는 잊힐 수 없이 남아버렸다는 후일담

신처럼 걷고 계명성처럼 말하는 이에게

 
1.
네가 바라는 건 사랑받는 거지. 이카본에게 모르간은 불쑥 말한다. ‘누구에게’를 명백히 누락하고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이 없자, 그녀는 손가락을 튕겨 이제껏 그가 오며가며 얼굴을 마주했던 귀족 영양들의 얼굴들을 떠오르게 한다. 안개의 성에 발 들인 적 있는 이들도, 없는 이들도 있다.
모두 너에게 호감이 있고 네 구혼을 기다리는 여자들이다. 그들 중 누구에게든 손 뻗어 구혼하거든 너를 사랑해줄 수 있어. 명백한 비웃음이 깃든 얼굴로 모르간은 이카본의 가슴팍을 쿡 찌른다. 그는 모욕당한 얼굴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이 이미 지긋지긋하게도 익숙해졌다는 듯 다만 한숨처럼 웃고 만다.
그렇게 행동하면 당신이 화낼 거 알아.

2.
그 어떤 모르간인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뺨을 붉히며 배시시 웃는 상아탑의 현자께서는 잠들어서 머리를 만지는 버릇이 있더라니 깨어서도 머리를 자꾸 쓰다듬었다며 카멜롯의 기사들의 말을 옮기고 또 옮기면서 범인류사의 모르간은 이카본에 관해 알았을 것이다.
이카본에 관한 기억은 그녀에게 허섭스레기 같은 것. 대강 뭉쳐서, 세심하게 걸러낼 만한 것도 되지 않아 던져버려도 그만인 기억인 것을.

3.
범몰간은 기본적으로는 남자가 좋지만 여자도 딱히 가리지는 않는다~ 느낌이고
이카본은 상대가 모르간이면 남자든 여자든 사랑했을 것(하지만 여자인 쪽이 더 좋은 건 사실) 이란 느낌이라서
이몰간은 범몰간 쪽이었다가 이카본 눈치 보고 대충 팻말 바꿔 들어준 느낌 정도로 해석함

상아탑의 현자로부터

1.
모르간이 신화 시대의 마지막 여명
이카본은 근대 계몽 지식인의 등불
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음
근본적으로 같은 시대와 같은 관념을 일정 이상 공유했던 사람인데 완전히 상징성이나 스탠스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1-1.
‪그래서 약간 이미지적으로 두 사람을 생각할 때면 그 저무는 시대를 마지막으로 밝히는 희미한 빛 아래서 팔을 들고 올려다보는 모르간의 뒷모습이고 이카본은 캄캄한 저 너머에서 혼자 등불을 들고 길을 밝히며 걸어오는 앞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근대도 중세도 이미 과거지만‬

2.
케이와 이카본의 다름은 결국 이상과 머릿속에 그리는 신념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케이는 개인의 사적인 행복 추구가 이상과 합일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아르토리아의 ‘아서 왕’으로서의 인생이 그녀 자신에게 잔인했다고 여기지만
이카본은 당시 이상의 실현이 곧 행복인 사람도 있는 거다. 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이었고 자신 또한 그 절대선을 브리튼에 이룩하고 싶어한 사람이니까… 크게 반목하지는 않았어도 굉장히 생각이 달라서 존중하되 서로 소 닭 보듯 했을 가능성이 좀 크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케이는 아서 왕에게 심취한 것이 아니라 인간 아르토리아가 우선인 사람이었던 거고 이카본은 대체 어떻게 우리처럼 가장 가까이 지낸 자들이 인간 아르토리아와 아서 왕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단 말인가, 그거야말로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이랄지… 범인류사 브리튼 시절 케이는 때로 모르간이 어째서 그를 가리켜 ‘완벽하게 싱그러운 남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은 것이다

3.
‪이카본은 굉장히 교만한 지식인이고 그건 요정들조차 각자 자기가 품고 있는 별을 향해 다가가려 한다고 하지 스스로를 ‘별’이라 칭하지 않는데 이카본은 버밀리온의 이카본 시절에도 이카본 키르히아이젠 시절에도 결국 자기 자신이 ‘별’이 되고자 걸어가는 사람인 거임‬
‪오로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아르토리아나, 모르간이나, 다른 원탁의 기사들에게 이정표를 주기 위해서‬
‪일정한 측면에선 이카본이란 인간은 모르간 이상으로 교만한 측면이 있다‬
‪인생에 별 같은 건 없다. 그런 건 다 자기 위안 삼는 걸 하늘에 달린 별이라고 믿는 것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주인공으로 있게 하려는 사람이고 그 배역이 싫지 않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줄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별을, 그들에게는 실재하도록.‬
‪대충 이게… 이카본의 사고인 듯‬

4.
모르간 원전에서 치유사 전승도 있는 거 역시 너무 좋다…
이카본 놀리러 왔는데 서류 보다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길래 아무 겨우살이가지나 들어서 푹 찌르는 범인류사 모르간
잠 확 깨서 우와 효과 끝내준다 여기가 잠 깨는 자리냐고 물었더니 졸길래 아무데나 찔렀다고 말함
한편 이것을 지켜보는 아르토리아
oO(나뭇가지로 사람을 찌르면 어딜 찔러도 잠이 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