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류사 브리튼 (OCT~NOV, 2023)

유년의 뜰

 

1.
범인류사의 브리튼에서, 모드레드의 반란이 진압되었음을, 모르간이 아서 왕을 데리고 아발론으로 떠났음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상아탑의 서고에 꽂아두고 나온 날. 이카본은 층계에 기대 서 제 손을 내려다본다. 펜을 오래 잡아 남은 중지 첫 마디의 굳은살만 아니라면, 이만치 고생을 모르는 것이 없을 듯한 손이다.
둘도 없는 벗이었던 아서 왕도, 꼭 그와 같이 속삭이던 멀린도, 그들을 따르던 원탁의 기사도, 사랑하던 모르간도 더 이상 이 브리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비는 서서히 사그라들 것이고 이카본 또한 그들을 좇을는지도 모른다. 모든 말과 기록이 허섭스레기처럼 가볍게만 느껴진다. 그의 손에 남지 않은 것처럼. 오랫동안 내려다본 이카본은 혼자 남아 중얼인다.
모든 일이 여전히 이렇게, 내 두 손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해피 엔드를 다시 적는 것만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2.
이거 그냥 든 생각인데 처음에 이카본 아빠가 이카본을 그래도 좀…… 중세 귀족의 덕목 전투지휘관… 같은 걸로 써먹을 생각이 있어서 가르쳐보던 시절에 이카본 손이 완전 걸레짝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듦
보통 칼집에서 칼을 제대로 뽑는 자세를 배울 텐데 내가 알기로 중세 유럽의 도검은 베는 것보다 찌르기를 더 우선으로 해서 상대적으로 날은 덜 갈았단 말이야? 보통은 무딘 날이 예리한 날보다 실제 베일 때는 더 아프고…… 이카본은 거기서부터 엉망진창일 테니 엄지와 검지 사이가 며칠 새에 걸레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물론 타입문은 고증을 일부러 무시한 경향이 있어서 이카본이라면 정석적인 도검보다 레이피어 같은 걸 썼겠지만 암튼 생각해보면 그렇다임
훌쩍거리면서 손에 붕대 감고 털레털레 수도원 가서 책 받아오는 날 모르간이랑 마주치면 왠지 모르간이 손 보고 픽 비웃었으면 좋겠다

 

 

신처럼 걷고 계명성처럼 말하는 이에게

 

1.
범인류사 브리튼 시절의 이카본을 가리켜 범인류사의 모르간이, 그는 완벽하게 싱그러웠다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은 동의하겠지만 멀린과 아르토리아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오로지 이카본을 보는 모르간의 눈에 의한 것이므로 모르간의 옛날을 아는 자들은 그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탓일까. 바람을 맞으며 해사하게 웃는 그 이카본을 향해 모르간은 때때로 생각한다.
행복은 경험이다. 행복은 사유가 아니다.
범인류사의 모르간이 이카본을 보며 느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브리튼을 갖는다면 그녀는 행복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행복이란 것을 몽상한다면, 언제고, 그녀는, 그녀와 같은 것으로 나서는 다른 길을 걷고 사랑받은 남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2.
아는가 어느 비 내리는 밤 그대의 처마 밑을 누가 울고 가는지
김혜린의 <테르미도르>에서 나온 샹송 가사인데 문득 그냥 좋아서……. 이카본의 서번트가 된 이문대 모르간이 꿈을 꾼다면 범인류사 모르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카본을 보는 꿈이었다면 좋겠다. 만나자고 하고선,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을 염으로—처음부터 만날 생각도 없었지만—만나주지 않는 범인류사 모르간이 창가에서 턱을 괴고 이카본을 내려다보는 꿈. 미련하게도 밤이 저물도록 기다리는 이를 내려다볼 적에 모르간은 이카본이 짓는 표정을 모른다. 어떤 얼굴을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범인류사 모르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문대 모르간은 어째서인지, 알 것만 같다. 이미 본 것처럼.

 

 

상아탑의 현자로부터

 

1.
사랑했다가 미워했다가…… 또 다시 사랑하게 되고 마는 것. 범인류사의 모르간이 가졌던 상대를 향한 감정, 애정은 으레 그런 것이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양가감정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본래 타인에 갖는 감정은 모두 그렇지 않던가? 멀린에 관해서도, 아르토리아에 관해서도, ……우서 펜드래건에 관해서도.
그래서 그녀는, 항상 제 거짓말을 알고도 속아넘어가주는 이에게 단 한 번 본심을 들키고 말 위험조차 감수하고 단 한 번만 물었다. 미워한 적이, 원망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버밀리온의 이카본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한 번도 없어.
그건 솔직한 답이었지만, 그녀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모르간 아닌 다른 이들은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모르간 아닌 다른 이들은 이런 사랑을 받는 게 당연하단 말인가.

2.
원전 모르간 일화 중에 모르간이 트리스탄 경에게 란슬롯 경으로 추정되는 한 기사가 왕과 왕비의 머리를 밟고 서 있는 그림이 그려진 방패를 준 일화가 있다. 세 사람의 관계를 폭로하고 싶어하던 모르간의 행동에 아서 왕은 몹시도 상심했다고.
이제 그녀의 악의는 새로울 것도 없고,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지만, 그날 밤 내내 아르토리아는 램프 하나만 깜박이는 원탁에 앉아 말이 없었겠지. 그만 들어가 잠드는 게 좋을 거라고 다가온 이카본은, 아르토리아를 오로지 그의 언어로 위로한다. 그깟 그림으로 손상될 명예라면 이미 천 번을 짓눌려 죽었을 것이라고. 마음 상하지 말라고.
깜박이는 램프를 지켜보던 아르토리아는, 한참 만에야, 오래 말하지 않아 갈라진 음성으로 조용히 말한다. 안다고. 나를 상심하게 한 것은 먹칠하려 한 명예가 아니라 그녀의 악의라고.

3.
범인류사 시절, 버밀리온의 영주 이카본은 사촌누이들이나 다른 친척들에게 그냥 자연스럽게 뭔가 선물하는 게 익숙했다. 시집 간 누이들이든, 서원한 웃어른이든 편지와 함께. 그냥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네 생각이 나 동봉한다. 모쪼록, 네게 기쁜 선물이 된다면 좋겠구나.
짤막하게도 쓴 편지를 쓰면 으레 긴 답장과 함께 답례가 오고… 그 평이하고 화목한 집안의 규칙 같은 소리가 범인류사 모르간에게는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경멸과 혐오감을 불러일으켰겠지.

4.
이런 밤에 모드레드 진압을 앞둔 아르토리아랑 난간에 지도를 놓고 후미의 대비를 고심하던 이카본이 이야기하는 거 보고 싶다. 이카본이 아무리 전투사령관으로는 재능이 없다고 해도… ‘아서 왕’이 모드레드를 대적하고 기사들의 빈 자리가 눈에 띈 후로 어느 기사들을 후미에 대기시켜야 할지 하나씩 후보를 거론하는 것은 오로지 그와 나눌 이야기니까. 아르토리아가 처음으로 먼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꺼냈으면 좋겠다.
네게는 지금 이 순간도 카운트다운을 반복해서 번복하는 것과 다름없겠지. 브리튼의 멸망은 전쟁과 외침과는 무관한 일이니까.
아르토리아의 말에 이카본은 항상 입에 올리던 실제적인 말이나, 그 이야기는 버밀리온의 상아탑에서 끝맺은 후로 금기나 다름없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냐는 말 대신 가만히 웃기만 하다가 지도를 접는다. 반 정도는 진심으로, 반 정도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처럼 말을 덧붙인다. 피로하군요…… 전하. 밤이 늦은 탓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동이 트기 전 출진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곤 이어지는 아주 희미한, 내 상념이 나를 넘어서려 함인가……. 같은 방백을 아르토리아는 똑똑히 듣겠지. 쓴웃음과 같은, 가장 솔직한 말을.
결국 ‘아서 왕’은 이카본에게 그가 버리고 떠나온 모르간 르 페이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고개만 끄덕이며, 말하기를…… 늦지 않게 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