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류사 브리튼 (MAY, 2023)

유년의 뜰

 

1.
범인류사 모르간이 어렸을 때…… 수녀원이라고 해도 진짜로 서원했을 리는 없고 해서 바깥 출입이나 외부인 만나는 건 생각보다 손쉬웠을 것 같은데 그래서 멀린과 연줄도 있었을 테고…
그래서 아무튼 몇 개월에 한 번씩 모르간이 수녀원에서 나왔을 때 근처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게 책 받아가던 이카본을 만났으면 좋겠다.
나이 든 자들 사이에서 사과처럼 발그레한 볼을 하고서 재잘거리는 버밀리온의 아드님. 아르토리아와 나이가 같다는 것만으로 심기가 불편해지려던 찰나 돌아본 이카본과 눈을 마주친 뒤엔 모르간이 이런 말을 들었겠지…
당신은 신처럼 걷고 계명성처럼 말하는구나.
눈을 반짝거리며 하는 말이 우스워 그녀는 픽 웃고, 또 이어 몹시도 편리한 마리오네트를 손에 넣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2.
이카본은 엄밀히 말해 찐중세 기준으로는 그리 미덥지 못한 아들이며 후계자였을 것이다. 왜냐면 중세 귀족의 덕목은 뛰어난 전투지휘관이었지 탑에 틀어박혀 마술이니 학문을 연구하면서 더 나은 평화 안식을 주는 결말 이딴 것에 몰두하는 게 아니었거든. 더군다나 성 딸린 영주로서는 더더욱.
그래서 미덥지 못한 아들을 어떻게 공부시켜야 할까 고심하던 이카본의 아버지는 멀린과 우서의 개념수태 인간(aka 찐중세인의 덕성 높은 전투지휘관)에게 연줄을 대도록 했고 어린 아들은 성공했다 뭐 이런 것이지.
그리고 그 점이 ‘아이의 미덥지 못한 점을 껄끄러워하면서도 억지로 키우는 대신 강점으로 만들게 하면서 잘 살리는 양육방식’과 정반대 길을 걸었던 모르간으로 하여금 죽어도 그에게 호의적인 감정은 못 느끼게 했으리라 생각한다. 범인류사 모르간에게 얘는 내심 그냥 아르토리아 이상의 꼴같잖은 놈이었을 것

3.
어렸을 때 이카본이 펑펑 울면서 보라색 장미 네 송이를 주면서 모르간한테 고백한 적이 있는데 모르간은 그가 평생 희망고문에 시달리다 죽을 거란 걸 알면서도 가만히 웃으면서 그중 한 송이만 그에게 되돌려주고 나머지 세 송이를 받아 안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가 선물한 장미는 어째서 행여나 손이라도 다칠까 저어하는 것처럼 모조리 가시를 솎아낸 장미들일까

장미의 꽃말
1송이 : 첫 눈에 반했습니다.
3송이 : 사랑합니다. 고백. 당신과 나, 우리의 사랑.
4송이 : 죽을 때까지 이 마음 변치 않습니다.

4.
오랫동안 왼손잡이는 불길한 사람이었고 이카본도 왼손잡이에서 교정한 양손잡이니까 범인류사 모르간이 내심으로는 좀 더 자기가 ‘정상성’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으려나
그리곤 그 정상성이 없는 사람이 옳음을 향해 가는 모습에 속이 뒤틀렸으면‬

5.
모르간은 여러 사람의 입으로도 공인된 천재였지만…… 이카본은 수재였으리라 생각한다
모르간이 지향하고자 하는 것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은 있지만 그녀와 같이 도달할 재능은 없는

6.
상아탑에 틀어박혀 지내던 시기의 이카본은 정말이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얼마 전 보았던 장계에서 추수 이야기가 있었던 것만 같아 창문을 열면 어느덧 겨울도 온데간데 없고 봄이 다 와 있겠지. 또 장계를 열면 춘궁기 이야기로 그득하고…
그럴 때면 가끔씩, 범인류사의 모르간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배부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조금 그녀가 무엇을 가져간다 해도 문제 없으리라고. 간단하게도 합리화를 해버리면서.

 

 

신처럼 걷고 계명성처럼 말하는 이에게

 

1.
범인류사의 모르간이 정신적으로 파산하던 때의 이야기.
모르간은 번번이 거짓말로 이카본을 구슬렀다. 그녀가 결혼을 할 때도, 멀린에게 미련을 가질 때도. 어쩔 수 없었다고, 내 입장이 얼마나 곤란한지 알지 않느냐고, 첫눈에 반한 건 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카본은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거짓말이란 걸 알지 못하는 척 결국 그 말에 속아주고 만다.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면 그녀의 거짓말까지 사랑해야 하니까. 거짓말하는 게 그녀의 본성.
모르간이 안개의 성을 떠나던 날 손수 램프를 들고 안개를 헤쳐 성문까지 바래다주던 이카본은 결국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날 힘들게 할 거라면 처음부터 거절하면 됐잖아…….
그 눈물을 보는 건 제법 즐거웠지만, 한참 올려다보던 모르간은 입꼬리만 끌어당겨 웃고,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너 헷갈리게 한 적 있었던가?
애당초, 그 고백을 받아주었다고 했지 연인이 되겠다고 한 적은 없었잖아. 사실 내가 거짓말하는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어지는 말에 이카본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선 물끄러미 모르간을 바라보았다. 그 웃는 얼굴 그대로, 모르간은 마차에 올라 떠났다.
이카본은 그 뒤에도 번번이 모르간이 귓가에 속삭일 때마다 휘둘리고 원하는 것을 내주었다.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모르간이 처음으로 이카본에게 거절당했던 것은 모드레드의 찬탈이 실패나 자멸로 끝나지 않도록 ‘모드레드의 멀린’이 되라고 요구했을 때였다. 그는 모르간이, 모드레드가 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 그녀는 생전 신경도 써본 적 없는 익명의 인간들, 카멜롯 장원 바깥의 농노들, 하잘것없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숫자와 현실로 조목조목 들어야 했다. 모르간 르 페이가 브리튼의 주인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따위 말이라니.
망연히 듣고만 있던 모르간에게서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이카본은 물었다.
내가 당신 헷갈리게 하고 있는 거니?

2.
이미 이문대의 모르간에게 사랑에 빠진 이상 이카본은 범인류사의 룰러 모르간을 만나도 묘하게…… 냉정해진 구석이 있을 것 같다 미묘하게 쌍방혐관과 유사해질 느낌
어처구니가 없어 말아올린 입꼬리가 하악골이 달달 떨리는 모르간 내가 갖긴 싫고 남 주긴 아깝고

3.
범인류사 브리튼에서 이카본은 하늘의 별을 보고 앞날을 점치는 자였고 모르간은 생이 흘러가고 쓸려가는 바다로써 앞날을 점치는 자였는데도 두 사람은 각기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반대라는 점이 좋다…… 지상에 발 붙인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관해서
그리고 조금 이문대의 모르간은 마침내 브리튼의 새벽별이며 저녁별이 되었으므로 이카본과 마주볼…… 어떤 상대가 되었다는 점이

 

 

상아탑의 현자로부터

 

1.
늦은 밤에, 자기 자리도 없는 원탁에 주저앉아 꾸벅꾸벅 조는 이카본이랑 업무 마치고 나오는 아르토리아랑 이야기하는 게 보고 싶다. 그는 잠에 취해 있을 때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인지능력이 3할은 더 떨어져 있으니까 꼭 대나무숲처럼 말했으면.
누이 간의 살이 우리의 정해진 천명인가 싶다가도 가끔은 나를 왜 이리 미워하시는가 싶어진다고…… 항시 정말로 편린처럼만 보이는 아르토리아의 사람 같은 일면에 잠 많은 상아탑의 현자는 그제야 깜박 눈을 떠 아르토리아를 바라보겠지. 그리곤 웃으면서 그 또한, 대나무숲처럼. 나는……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꼭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조금 슬퍼져…….

@드림주의 If가 궁금해요! 서사의 특정 부분에서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혹은 드림주가 다른 환경에 있었다면... 등!
이카본이 범인류사의 모르간에 가졌던 감정을 소중했던 첫사랑 정도로 좋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모르간이랑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듯
일억분의 일 확률로 만에 하나 모르간이 로트 왕 대신 이카본이랑 결혼했다거나 모르간이 브리튼 왕 먹었다거나 하면 정말 사사건건 부딪히고 의견 충돌로 싸우고 파탄 났을걸……………… 차라리 얼굴을 몇 번 못 보고 보낸 사이라서 모르간도 이카본을 단순히 ‘내가 갖긴 싫고 남 주기는 아깝고’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고 이카본도 모르간을 사랑스러운 첫사랑으로 추억할 수 있었던 것임

@드림이 뮤지컬이 된다면 드림주 개인 넘버 제목은 뭘지 얘기 좀 해주고가
사실…… 헤드윅 Long Grift
드림캐는 JCS에 부비는데 드림주는 범인류사 쪽에서 자주 헤드윅 떠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