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대 (MAR, 2024)

두 사람의 성질

 
1.
여왕 모르간 만난 어린 이카본
몇 살이 되었건 ‘수도원에 유폐된 왕녀 모르간’이 아니라 ‘여왕 모르간’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낯선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베일을 들추곤 손가락 끝으로 모르간 뺨 꾹 눌러보지 않을까. 실체를 실감하고 싶은 것처럼. 서슴없이도 닿는 손길이 꼭 그 나이 어린애가 할 법해서 가만히 바라보다가 뺨이 푹 들어가도록 누른 손이 떨어지면, 느짓하고 느른하게 눈을 감았다 뜨는 모르간의 얼굴.
🕰️ - 이곳에선 아르토리아가 왕이 되지 않았단 말인가요?
가장 처음 입을 열어 묻는 게 그런 말인가. 모르간은 기도 안 찬다는 듯 허, 탄식하려다가, 그가 평생의 벗을 얼마나 아꼈는지 ‘아서 왕’의 인생에 얼마나 충성하고 마지막의 마지막에선 얼마나 그 짐을 같이 나눠 지려 했는지 생각하면, 도무지 그럴 수 없어 입을 다문다. 대신 어린 이카본을 가만히 안아들고선 눈높이를 맞춘다.
🍎 - 내게 궁금한 건 그뿐이냐.
🕰️ - ……‘당신’은 나를 싫어하지 않는지…… 가.
망설이고 머뭇거린 끝에 나온 말. 이카본은 처음부터 오로지 그것만을 묻고 싶었던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 이전 이미 ‘싫어하지나 않는지’부터 알아야 했다는 것처럼.

2.
이카본과 모르간의 세계인식은 인간과 요정의 성질 차이만큼만 차이를 갖는다. 두 지식인의 지독한 엘리트의식과 말도 안 되는 책임감.
모르간은 그녀가 바라고 사랑해 마지않는 하나를 위해 나머지의 생명을 묵과했다면 이카본은 사랑해 마지않는 하나가 그에게 소중하다면 인간은 변할 것이기에 나머지의 생명도 변할 것을 믿고 함께 구제한 사람이다. 온 인생을 바쳐 그 자신이 변했음을 증명했으므로 가능한, 회의주의에 입각한 역설적인 믿음.
요정은 그리 변하지 않는다.
알아.
그 짤막한 말 때문에 막연히 모르간은, 어째서 범인류사의 모르간이 그를 지독히도 미워했는지 알 것 같아진다. 토네리코였다면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의 조건에.

HAPPY END?

 
1.
🕰️ - 가끔 꿈을 꾸고 나면 한참 침대에 누워서 복기하게 돼. 정말로 그 자리에 있던 것 같아서.
🍎 - 한가하기도 하군. 간밤엔 또 무슨 꿈을 꾸었느냐.
🕰️ - 당신과 같이 바다에 가는 꿈이었어.
🍎 - 즐거웠겠구나.
🕰️ - 응. ……응, 무척. 많이…….
🍎 - ……같이 가겠느냐.
🕰️ - 🥰 좋아!
 
2.
가끔, 모르간은 이카본의 경어를 듣는다. 아이를 대하듯 반질반질하게 닦아낸 교본적인 말씨만큼이나 반질반질한 말씨로. 추밀원 의장으로서도 그녀의 손님으로서도 공개적인 곳에서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은 부지런히도 모르간을 윗전으로 깍듯이 섬기며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지만, 그와 꼭 다른 경어로.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을까. 피로한 얼굴로 그녀의 침실에 들어와 스스럼없이 침대에 앉고는, 한참이나 시트에 손을 짚은 채 그를 바라보는 눈길을 마주보다가, 소리 없이 웃으며 속삭이는 음성.
제가 당신께…… 무엇을 드렸는지.

3.
이카본은 시중 드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그야, 그리도 당연스럽게 떠받들리며 자라던 도련님이고 영주님이었으니. 그리하여 모르간은 처음 이카본이 그녀의 옷가지를 챙겨올 때도 도통 시큰둥하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정성스럽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추를 채우고, 소맷부리에서 끝이 제대로 떨어지도록 어깨 언저리에서 옷깃을 끌어당기는 움직임. 말없이 이리로 돌아보라며 까닥이는 손. 까탈스러운 매듭을 동여맬 때면 깊어지는 눈길. 정말로, 여느 시종들보다 더 매끄럽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능숙함을 가장한다.
마침내 이카본이 떨어질 때, 모르간은 관에 손을 뻗다 말고 말없이 고갯짓한다. 가만히 따라붙는 눈길, 바람을 이행하는 손.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의 두 손이 베일을 늘어뜨린 푸른 관을 들자 모르간은 전에 없이 고요하게 고개를 숙인다. 세례자가 베푸는 대관을 치르듯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4.
붕락 후에도 요정국 브리튼 어디에도 이카본의 상아탑은 세워지지 않는다. 그를 위한 추밀원은 설립되었으나 상앗빛 탑과는 누구보다도 거리가 있는 모양새다. 그러나 여왕 모르간은 추밀원 의장 이카본을 가리켜 늘 상아탑의 현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로지, 모르간과 이카본만이 그녀가 왜 상아탑의 현자라고 말하는지 안다. 그것만은 그들의 유일성임을 증명하듯.
 
5.
바다 먼 곳, 그리고 다시 마을이 들어선 틴타겔에 시찰 다녀온 추밀원 의장 이카본 키르히아이젠.
이카본은 늦은 오후 카멜롯으로 돌아오자마자 제 방으로 들어간다. 장계나 보고 따위는 없이,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를 머릿속에서 씻어내야 할 것처럼.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이카본은 여왕에게 귀환했음을 알리지 않고, 사적으로도 찾아오지 않아서, 일과가 다 끝난 후에야 모르간은 이카본의 방으로 든다.
불 꺼진 방. 고요한 사위. 천개를 드리운 침대. 드리운 천개를 걷고 가만히 침대맡에 걸터앉으면 누워 있던 이카본의 눈이 스르르 모르간을 향한다. 퍽 상심한 눈을 보아하니 또 뭐가 그리 문제인지 응석을 부릴 만한 기운도 없는 모양이다. 이카본의 눈이 깜박이고, 힘없이 흘러나오는 말만 그녀에게 가 닿았다.
불 켜줘, 심장이 깜깜해…….
온 요정국에서 여왕을 부리는 자는 너뿐일 게다.
언제나 상심한 이를 달래는 건 이카본의 몫이었음에도. 군말없이 모르간이 협탁의 램프를 켜주자 이카본이 모르간의 품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묻는다. 한참이나 말도 없이. 드물게도 그리 쓸쓸하게 구는 모습 때문에, 모르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여왕이 그날 침전으로 들지 않았음만이 풍문처럼 떠돌 뿐이다.
https://youtu.be/Oyf5o1zWMd0

6.
추밀원장 이카본이랑 여왕 모르간이랑 사냥 나간 적도 있으려나. 이카본이 좋아서 나간다기보단 으레 사냥이 열릴 때면 왕후귀족 다 몰려 나갈 테니 예의상 참석한 거겠지만…
🕰️ - 사냥. 별로 좋은 기분은 안 들 것 같은데.
🍎 - 자리만 채우거라.
🕰️ - ……내게는 흰 매로 마련해주련?
사냥개들을 부리는 건 도통 꺼리는 것 같더니. 이카본은 사냥 내내 매 두어 마리를 뜻 없이 날려보낸다. 표적이 정해지지 않은 곳을 활강하는 매들은 퍽 불만스러운 듯도 하지만, 결국 장갑 위로 안착할 적이면 모르간은 그가 그 새들을 제법 친밀하게 말벗 삼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영주였다는 걸 왜 그녀는 항상 잊을까.
픽 웃으며 이카본이 마지막으로 매 날려보낸 곳에서 우연찮게 흰 이리라도 발견했으려나… 어설프게 시위에 화살 메기다가 놓치거든 뒤에서 모르간이 담담하게 활 쏘는 거나 보고 싶다. 언제 뒤따랐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뤄진 일이라,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을 적이면, 그녀는 퍽 시큰둥하게 말한다.
🍎 - 내 이럴 줄 알았지.
6-1.
이카본의 체면을 세워줄… 것까진 없었지만 모르간이 말에서 내리더니 이리 잡았던 화살에 매였던 매듭 풀고선 잠자코 말없이 이카본한테 손 내미는 거나 보고 싶네…
자기 화살 건네면 이카본 화살처럼 새로 묶으며 턱짓하곤 싣거라. 하더니 돌아가는 거… 라거나
사실 중세풍 뭔가가 보고 싶었는 듯

해시태그

 
@드주/드캐의 식단은? <저속노화 vs 중속노화 vs 가속노화>
영생을 사는 모르간: 극 저속노화식단
백 년 고작 살 이카본: 극 가속노화식단 고기랑 스위트 없으면 식사 안 함
🍎 - 난 너를 오래오래 사랑하고 싶어 협조 좀 해

@ 탐라 드림 구몬! 드림캐랑 드림주 중에 누가 손이 더 따뜻하나요? 손이 아니라도 누가 더 온도가 높나요?
이전에도 종종 말했던 것 같지만 이카본의 손이 닿을 적이면 불에 덴 것처럼 놀라는 모르간을 좋아해서
체온이 서늘한 모르간이 이카본을 가리켜 말하기를, “타오르는 듯한 그의 체온”.

적폐 상아사과

 
1.
이카본 키르히아이젠 거의 항상 낮에 산책 나가는데 모르간이랑 같이 나갈 때면 번번이 밤 산책이면 좋겠다. 그야 모르간의 일과 자체가 저녁에나 끝나서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냥 둘이 같이 걸을 때 가장 조용한 시간이라서.
회고하기를, 고요할 때의 도란도란 흘러나오는 소리는 왜 그리 좋던지…….

2.
🕰️ - 체리블라섬. 한철 피고 한철 사그라들어. 덧없게 지지.
🍎 - 그 말을 어째서 나를 보며 하는 게냐.
🕰️ - ……후후. 뭐,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체리블라섬에 부여한 의미는 절세미인이라는군.
🍎 - 하. (입꼬리 아주 조금 올라감)
🕰️ - 나를 닮았어, 그렇지?
🍎 - …………하.

토네리코

 
1.
모르간은 잠에서 깬다. 마지막으로 한밤중에 잠에서 깬 지는 오래되었고 꿈을 꾸지 않은 지는 그보다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와 꿈 때문에 잠에서 깬다니. 이카본의 꿈을.
퍽 소란스럽게 일어났는지 잠들어 있던 이카본이 부스스 눈을 뜨고는 그녀를 올려다본다. 어느덧 자연스럽게도 곁에 붙어오거든, 졸음에 취한 입술을 열어 연유를 묻는다.
🍎 - ……꿈을 꾸었다. 긴.
🕰️ - 꿈은 언제나 체감하는 것 이상으로 짧지만. ……무슨 꿈이었니. 악몽이었어?
🍎 - 그만두자꾸나. 조금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젓거든, 이미 그것만으로 발설한 기분이 들고 만다. 그러나 어떻게 말하겠는가.
구세주의 이름을 자칭하던 시절 생각했던, 어떤, 버밀리온의 이카본과의 만약을. 그녀로 하여금 사천 년 시간에 목숨을 걸고 믿게 했던 근거를.

요정기사들이랑 상아탑의 남자랑

1.
이카본이 손님이던 시절엔 모르간이 ‘내 것’과 관계되지 말라고 했고 바반 시도 ‘온당한 브리튼’의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얽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 다른 요정기사들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던 터라 붕락엔딩에선 요정기사-이카본 사이의 관계는 한동안 훨씬 더 사무적이고 드라이하지 않았을까.
칼데아엔딩 때만큼이나 깔깔거리고 서로 좋아하고 믿는 관계가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 같다.
바게스트는 그를 의장 각하라고 부르면 당연스레 무슨 일이죠, 하고 응대하는 게 처음엔 제법 낯설었을지도 모르고. 여왕의 손님이던 것만 알았던 이카본이라면 왠지 부끄러운걸, 그런 말, 하고 대답할 줄 알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