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맹세

스왑AU의 이카본과 모르간

 

 

　……지금 이 순간, 당신께서 복수 같은 것은 생각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허나 신은 늙어 근심만 늘어가고 눈은 천식賤息보다 어두워 천식이 당신께 본 것을 보지 못하나이다. 천식도 아직 어려 신이 보고 예감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지요. 그리하여 신은 근심하고 또 근심하나이다.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당신께서는 지금 같은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으십니까. 복수심이란 것은 눈 덮인 칼과 같아서, 서릿발 같을 때 감추어져 있고 안락할 때 녹아 기승을 부리지 않습니까…….
　며칠 전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버밀리온의 영주는 대답지 않는 모르간 앞에서 그 많은 말을 주워섬기다 돌아갔다. 애당초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의무에 쫓기듯 서한으로 전하고 다시금 수도원으로 찾아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르간은 내내 시부가 될는지도 모를 그의 말을 들었고, 생각지 않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 그를 앞에 둔 채 올라오는 쓴 물만을 삼켜야 했다.
　버밀리온의 영주는 그가 우서 펜드래건의 신하 아닌 다른 것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부왕이 아닌 우서 펜드래건이라는 호명에 담긴 함의를 모르간은 모르지 않았다. 그처럼 버밀리온의 이카본 또한 아르토리아 펜드래건의, 우서 펜드래건이 탄생부터 기름 부은 적법한 후계자의 신하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길렀으므로 아이는 죽는 날까지 ‘아서 왕’의 신하여야 한다는 말에서 모르간은 자신이 끼어들지 못할 시간과 관계의 이지러진 틈새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가 떠난 후로 수도원의 소란은 잦아들었으나 한순간도 조용하지 않았다. 세상과 결별한 이들조차 임금의 충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약 이상으로 충절을 바치는 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그 아들에게 머리 숙이는 자들이라면, 그와 꼭 같은 생각으로 밤새 시간을 채웠으리라. 어렵지 않은 추측이었고 그 ‘혼사’의 소문이 어찌 돌아가든 도는 풍문이 견디기 어려워 모르간은 더 이상 수도원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이라면 인간과 섞여 사는 것에 평생 미련을 갖지 않을 수 있을 듯싶었으므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인의 말을 듣는 내내 모르간은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했다. 마지막으로 브리튼을 돌아보고, 속히 사철 사과꽃이 만발하고 과실을 맺을 섬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정말이지 유아적인 생각이었을는지도 몰랐으나 근래 일어나는 일은 모조리 한순간 들었던 생각에 골몰하게끔 했다. 정말이지 싫은 일뿐이라고 어린 시절의 모르간이었다면 종알거렸을는지도 몰랐다. 수도원이 제 일로 소란스러운 것도 항시 소문이 깔끔하던 이카본이 온갖 꼬리표를 달고 곳곳에 불려 다녀야 하는 것도 갓 왕위에 오른 이 때문에 분주한 것도 모조리 꺼려지는 일뿐이었다. 그녀를 받아들이고 서원을 만류했던 수도원장조차 사랑과 결혼은 다른 문제라 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스승이 자신을 일컬어 브리튼 북쪽 끝으로 보내버리는 게 좋지 않으냐던 의견을 냈고 이카본을 설득했다던 소문이 견디기 힘들었다. 말의 우선순위가 명확했고 보이는 신뢰의 척도가 깔끔했다. 그것은 이카본이 충성을 맹세했다던 벗인 ‘아서 왕’을 따르는 이상 이카본 또한 결코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러므로, 사랑과 결혼은 다른 문제였다.
　근 일 년간 모르간은 정말로 행복했다. 잠시 눈만 떼어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성장기 소년의 키, 달라지는 눈높이, 쓰는 말씨의 다름과 매일같이 무르익던 차분한 음성의 성질과 같은 그 모든 사소한 것으로 인해 행복했다. 사랑이라면 사랑이었고 다만 구애를 받았다고 그녀 자신의 감정에 선을 긋더라도 사랑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항시 정해진 시각 만나던 소년이 버밀리온의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좋았을는지도 모른다. 모르간이 우서 펜드래건의 내친 적장녀가 아닐 수는 없었으므로 행복을 생각할 때 그녀는 오로지 그것만을 바랐다.
　시간과 세월 사이의 말이 다름을 확정 지을 만치 고요한 곳에서는, 세월이 흐르는 소리조차 들릴 터였으나 흘러가는 세월을 재는 일은 무용할 터였다. 사과의 섬에서 모르간은 그 무용한 것만을, 오로지 무용하지 않았을 때 보았던 것으로 가치를 부여하며 보낼 작정이었다. 정리할 짐이 없어 손은 가벼웠고 배웅할 수도원의 인물 또한 없어 발걸음이 빨랐다. 고요하고 번잡스럽고 정리되지 못하는 수도원을 나서려던 차에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다시금 소란을 일으키며 가까워졌다.
　흰 말을 탄 소년이었다. 모르간은 그가 말을 탄 모습을 처음 보았다. 생전 마차가 아니고서야 먼 곳까지 걸음 하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런 바람에 머리를 헝클어놓을 것만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모르간이 알고 있는 이카본이란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더라도 버밀리온의 이카본인 이상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 있듯. 쌓아 올린 생각일랑 모조리 짓밟은 것처럼 정신없이 찾아온 소년은, 이카본으로 말에서 뛰어내려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당신을…….”

　변성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소년의 것처럼 앳되고 높은 음성이 운을 떼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두 손으로 모르간의 양손을 맞잡았다. 말 타는 방식이 서툴러 흙먼지가 뺨에서 가실 일이 없는 태가 났고 아메지스트 같던 눈만은 반짝였다. 수선화와 수국을 엮어 그녀에게 안기던 순간처럼.

　“일생을 다해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제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
　“저를 지키는 모든 것이 당신을 털끝 하나 해할 수 없도록…….”

　오연하게 든 열다섯 살짜리 소년의 상앗빛 이마. 싱그럽고 아름다운 홍안. 맞잡은 손은 능숙하지 못한 데다 제 말의 의미는 아는 주제에 그 책임이 무겁고 두려워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 조금, 사랑스러웠고,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난 몇 주간 그리던 사과의 섬을 넘어서, 그리도 골몰하던 것을 송두리째 백지로 만들며 감히 맹세하는 자신의 모든 것으로부터…… 라는 말이 애처로워서.
　아아, 날이 흐르고 쏜살같이 지새어서 이날 이 순간을 두고 엉망진창인 꼴로 청혼했었노라고 추억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