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드스턴 3가 오트 쿠튀르 아틀리에

추밀원장이 여왕마마 옷 맞추는 놀이에 한 해 연봉 다 털어넣는 이야기
여왕의 점막에 장미를 틔운 세계(장편)의 프롤로그로 사용되었습니다.

 

 

　“설마 오늘 같은 날도 공무에 매달리고 나는 분신이랑 내보낼 줄은…….”
　“기억은 동일하고, 근본적으로 개체차는 없다. 돌아온 후에도 본체에 인계는 될 테지. 뭐가 불만인 거냐?”

　그 자리에 앉으면 다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니? 이카본은 문득 목까지 치받쳐 올랐던 말을 삼키듯 조심스럽게 제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모르간의 눈에도 보일 수 있을 만치 분명하게, 그리고 조용히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리고 나자 이카본은 슬 시선을 피했다.

　“아니, 뭐랄까. 당신은 왠지 그때 가서 생각하겠다고 말하고선 막상 그날이 되면 일이 바쁘니 약속은 취소하자고 할 것 같았달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을 것 같았달까…….”

　말이 어물어물 잘리고 흐려졌다. 다만 거짓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모르간’이라면 어김없이 그럴 터였고, 오늘도 꼭 한 시간만 기다릴 생각이었다. 합리적이지 않은 변명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익숙한 모르간 대신, 이카본을 손에 넣은 모르간에게는 언제고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합당한 사유 또한 있었다. 여왕이 일 년에 한 번 있을 축제 때도 공무에 매달려야 할 만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총하다는 사실은 요정국의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었으므로.
　눈을 가늘게 치뜬 채 한동안 이카본을 올려다보던 모르간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허, 마뜩잖게 터진 한숨도 미간에 깊이도 팬 골 모두가 분명치 못한 말을 타박하는 듯싶었다. 어린 것을 대하는 종류의 태도 앞에서 그가 들은 대답은 분명하게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뭐냐, 네 머릿속의 그 진절머리 나게 끔찍한 여성은.”
　“……아니, 물론 당신은 항상 약속을 지켜주긴 했지만…….”
　“너는 항상 기이할 정도로 최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군.”

　모르간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것만으로 답은 충분해 이카본이 황급히 그녀를 따라오리란 것을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한정 없이 가볍고 정보값 없는 대화가 끝날 때까지 충실하게도 기다리던 마부에게 고갯짓하고선 마차에 오르려 할 때, 어김없이 이카본은 모르간의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해묵은 질서와 범절이 시살스럽다더니 감정 이상으로 절차가 몸에 밴 남자였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가 에스코트 없이 발을 딛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런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모르간은 멀거니 이카본을 바라보다가, 손을 얹었다. 장갑 너머로도 그의 맨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한결같았다. 따뜻함보다는 더웠다는 감상이 적합했다. 고스란히 그녀를 감싸 쥐는 순간마저도.
　그는 평생을 살더라도 그와 같은 체온일 것이다.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닿을 적마다 불에 데는 것처럼 놀라게 하는 주제에,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그 이상 명확하게 전달할 수는 없음을.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입에 올리지 않을 테지만 언젠가 알기를 바라기도 할 만치 소망은 모순되고 합치되지 못해서, 어느덧 모르간은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매끄러운 음성으로 능변을 입에 올리던 추밀원 의장에게서 어물거리는 말이 나올 때의 기분을 다 알게 된 듯싶었다. 그녀는 마침내 예의 건조한 음성 그대로 입을 열었다.

　“……어디를 가고 싶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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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 모르간의 애인은 체력도 약했고 스스로 동하지 않으면 좀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산책 몇 발짝 말곤 걷는 데 취미가 없으니 야외 활동을 청하지 않으리라고는 예상했다. 제아무리 구미가 당길 음식이어도 고작해야 한 입 가져가고 나머지를 모조리 버리는 취미도 없으니 본 적도 없는 음식에 시간을 보내길 청하지 않으리라고도 짐작했다.
　기실 그녀는 어젯밤부터 이카본이 청할 만한 곳을 몇 곳 생각했다 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어 소거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도통 무얼 안겨주어야 좋아할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모르간은 무언가를 예상할 때 어긋나는 감각에 익숙하지 않았다. 한 번도 제 눈으로 본 것을 과신한다 생각한 적 없었음에도, 그녀의 추밀원장은 자주 생각지도 않은 말을 꺼내곤 했다.
　드물게도 오랫동안 고심했던 생각을 기어이 전면부정한 순간은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이 오트 쿠튀르 아틀리에가 줄지어 늘어선 거리에서 마차를 세웠을 때였다. 아틀리에에 들어서선 재단사에게 올해 작업물과 내년 프리 오픈 행사용으로 내보낼 옷본까지 모조리 요구하더니 곧장 모르간을 피팅룸으로 끌고 들어갔다. 옷본에서 결정되지 않은 직물의 종류를 거리낌없이 재단사에게 요청하고 프릴의 장식과 아낌없이 마련된 벨벳까지 바꾸기를 반복하고 나면, 또는 옷본 그대로 입히고 나서도, 무엇 하나 흡족하지 않은 것이 없는지 피팅했던 것은 전부 사들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봉급을 넘치도록 쥐여준 일을 후회했다. 기어이 아틀리에가 작업하던 드레스에 이브닝가운까지 동내고 나니 이제 좀 마음에 찼느냐고 묻기도 전 이카본은 맞은편 아틀리에로 손을 잡아끌었고, 네 곳째 같은 순서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체 몇 곳을 더 돌아다녀야 만족할는지. 그는 글래드스턴 3가에 입점한 아틀리에를 전부 돌아다닐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일 년에 한 번 여는 축제에, 이 내가 네게 하루를 모두 주겠다는데, 고작해야 나를 데리고 〈귀여운 여인〉 놀이를 하고 싶은 것뿐이었나?”

　결국 모르간은 이번 아틀리에가 특히 마음에 들었는지 유달리 오랫동안 버슬로 부풀린 곳에 달 장식을 고르던 이카본에게 툭 쏘아붙이고 말았다. 턱까지 괴고 카탈로그를 넘기는 데 골몰하던 이카본이 얼굴을 들었다. 저 자신이 듣기에 그리 살가운 말은 아니었음에도 아연한 얼굴도 능청스러운 얼굴도 아니었다. 푸시시 웃으며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모양새가 누가 보아도 전혀 맞지 않는 것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나 그거 칼데아에서나 처음 본 건데 언제 그런 것도 알았어?”
　“…….”

　아, 이런 사람이었지. 그리고 이런 사람이 정말로 있다는 걸 번번이 새로 깨달아야 했지. 생일에 자기가 선물을 주면서 받는 사람의 기쁨이 제 선물이라고 우기는 사람. 모르간은 체념에 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이런 말을 듣고선 당연스레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바라겠다 말하는 대신 지금의 상황을 더 기뻐하기만 할 반응이 빤히 보였음에도, 그녀는 결국 솔직한 대답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네가 아는 것이라면 모조리 보고 들었다…….”

　그깟 삼류 오락거리조차 무엇에 이끌려 흥미로워했을지 모르간은 알았다. 그래서 말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재단사가 몸에 다시금 줄자를 댈 적이면 지긋지긋하게도 어깨에 긴장이 들어가려 들 때조차 이카본의 웃음은 문자 그대로 해사했으므로.

　“다정하네, 당신.”
　“……정말로 네가 하고픈 것이라면 어울려주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그 마음이 다정하다는 거야.”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달싹인 입술이 말라가며 천천히 닫혔다. 모르간은 대답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전신을 비추는 거울에 시선을 두었다. 임금 노릇을 위해 정해둔 것이 아닌 것을 입고서 타인의 눈앞에 선 지가 얼마 만이었던가. 이전에 입은 옷들은 아니었겠느냐마는, 이번에 걸친 옷은 유독 낯설었다.
　테이블에 놓인 옷본을 보고 나면 이미 원형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뜯어고친 후였다. 어느 시절의 유행이었을지 쉬이 파악하기 힘든 변형이었고, 원본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손수 골랐다면 결코 고르지 않았을 종류의 옷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머물렀던 그녀 자신이라면 더더욱 고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카본이 손을 댄 곳이, 그리고 그가 고른 안목이 그녀에게 정확하게 어울리도록 아름다웠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그 어디에서 그의 소망 같은 것이 피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음에도.
　눈을 돌린 새 이카본이 다시금 재단사에게 더 요청한 모양이었다. 재단사는 어느새 얇은 실크 소재에 진주까지 달아 장식한 프릴을 가져와 두르고선 옷핀으로 허리의 핏을 재차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이 몇 번째였던가. 모르간은 인형 놀이의 지겨움보다도, 그 많은 옷핀이 한 번도 제 몸을 찌른 적 없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하지만 각하, 이렇게 하고 나면 분명 예쁘긴 예뻐도 걷기는 불편할 텐데요. 만일 정말로 폐하께서 직접 입어주신다면, 대단히 영광되긴 하지만, 역시 이것까지…….”
　“아, 그럼 다시 빼주세요. 하긴 단이 좀 있으니 불편하긴 불편하겠어요.”
　“됐다. 어차피 두 번 입을 것도 아니니. 저쪽이 해달라는 대로 하도록.”

　그깟 장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프릴 하나 두르자마자 눈까지 다 반짝이고 있었으면서 불편할 수도 있다는 말엔 손사래 치며 철회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그다운 행동이었다. 불편했다면 진작부터 피팅 자체를 그만두려 했을 일이었는데도. 그런 모습을 보고 나면 도무지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르간은 앞으로 몇 곳을 더 돌아볼지나 물어 둘까 생각하며 피로한 눈가를 훔쳐내었다. ……토틀롯이라면 그렇게까지 귀찮게 굴지는 않았을 테지. 어디 함부로 옷본에 손을 대려 하느냐며 쏘아붙이기라도 했을 테지…… 이제는 모조리 무용한 것이 된 생각이, 어느덧 일었다가 스러졌다. 어떤 기억으로도 대체할 수 없을 추억이 번잡스럽지 않게 된 지가 얼마 만인지 그녀는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될 따름이었다.
　어린 애인의 인형 놀이는 해가 저물도록 이어졌다. 아침나절 카멜롯에서 나섰던 듯했는데, 기어이 입점한 아틀리에가 더 남아나지 않게 된 후에야 이카본은 만족한 태를 보였고 모르간은 가장 익숙하게 여기던 차림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쓸어간 옷은 모두 그녀의 옷장 구석에 처박혀 한 번도 입지 않고 남아 있을 터였음에도 그는 어째서인지 자꾸만 헤실거리며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릴 따름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모르간은 불쑥, 버밀리온과 칼데아를 거쳤던 이카본에게 입을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