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어의 체온

체온은 신음처럼 고요하고 낯설고 버거워서

 

 

　“크리스마스로즈로군.”

　묻지 않았을 때 음성이 흘러나오기는 처음이었다. 창백하고 핏기없는 입술이 움직이며 뜻 없는 음절로, 형태소로 발음되는 것을 바라보며 이카본은 눈만 굴려 화장대 주위를 살폈다. 오늘의 장식은 갖은 색을 입힌 수국과 흰 매그놀리아였다. 색색이 주는 인상이 화려했으나 각각의 색은 깊지 않고 호화롭지 않아 눈이 피로하지 않은 꽃들이었다. 그러므로 향 또한 장미수와 섞였다 해서 어지럽지는 않을 터인데.
　이카본은 다시금 화장대에 등을 기댄 채 앉은 모르간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으나 잠시였고, 모르간은 느리게 눈을 감을 따름이었다. 투정을 부리는 성격이었대도 염려스러웠을 테지만 별다른 말이 따라오지 않아 염려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음에 들지 않니?”
　“……아니. 자주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라. 장미수는 네 마음대로 해라. 싫지 않다.”

　‘마음대로’와 ‘싫지 않’은 것 사이의 온도를 가늠하기란 그녀 자신으로서도 어려운 일이었으나 모르간은 불필요한 말을 구태여 덧붙이며 이카본이 연 화장수 병 쪽으로 턱짓했다. 보지 않아도 보일, 그가 손끝에 화장수를 바르는 조심스러운 동작을 기다리며.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은 체온이 높았다. 때로 아무 예고 없이 손이 닿을 적이면 소스라치게 놀라기 마련이었고, 타오르는 듯한 그의 체온은 영영 익숙해지지 않을 것처럼 다가왔다. 손가락을 적신 화장수는 오로지 그에게 가 닿음으로써 빠르게 미지근해졌고 서늘할 때 풍기지 않을 법한 폭으로 진하게 향을 풍겼다. 맥 뛰는 곳에 향수를 뿌려 향을 멀리 보내듯 옅게만 배었던 크리스마스로즈의 향은 짙어지고 답잖은 관능성을 띠었다. 서늘하지 않고 너무 덥지도 않은 손가락이 천천히 피부 곳곳의 결을 정돈했다. 연인을 대하듯 연약한 눈 밑을 스치고 뺨을 어루만지더니 콧마루를 짚어 분을 바를 곳을 마련하는 손길 모두가 더디 지나가고 지나칠 정도로 정성스러워 낯설었다.
　이윽고 퍼프가 대담할 정도로 빠르고 고르게 분을 펴 발랐다. 뭉치지 않도록 빠르게 두드렸으나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고 한 번도 살갗에 쓸리는 일 없이 능숙했다. 퍼프가 떨어지고 나면 다시 한번 손이 와 닿았다. 뺨이 아닌 눈가며 코 주위처럼 폭이 좁아 건드리기 난해한 곳을 끄트머리로 건드리고 고르게 다듬었다. 브리튼에서 본 적도 없었으며 제 얼굴에 펴 바르지도 않았을 도구 모두가 이미 손에 익은 태가 났다.
　화장은 으레 혈색을 돋우고 푸르게 일어난 것을 감추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카본도 모르간도, 본래의 목적에 따랐을 때 아름다움을 어떻게 피워내야 할지 철저할 정도로 알았다. 서늘한 계통의 연한 분홍빛을 골랐을지도 모르는 손으로 블러셔를 아끼고 오롯이 베일 너머로도 인상이 흐려지지 않을 정도로만 뺨을 조명했다. 여왕 모르간이 무엇을 연출하고자 하는지 그는 철저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모르간의 시선이 팔레트를 쥔 이카본의 손으로 향했다. 눈가는 건드리지 않아 다시금 눈을 감을 일이 번거로웠을지 몰라도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는 브러쉬로 털어내듯 묻히는 대신 아주 조금씩만 손가락에 찍어 광대뼈 언저리와 윤곽선을 따라 펴 발랐다. 제 얼굴에 닿지 않아도 이미 제형을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빠르게도 녹는구나.”
　“얼음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아주 잠시간만 팔레트에 머무르고 얼굴에 와 닿는 체온이 번번이 낯설다고 말한다면, 그는 어떻게 웃을까. 쉬이도 가늠할 수 있을 법한 상상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쉬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는 않았다. 이카본은 블러셔 팔레트를 내려놓고 섀도용 팔레트를 집어 들었다.
　모르간이 항시 고르던 것과 그녀의 시중을 들던 시종들이 쓰던 색 대신, 그는 팔레트 몇 가지를 쪼개 색을 섞더니 대담하게도 곧장 눈두덩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눈매를 따르고, 눈초리에 머무르는 먹붓은 온도가 전해지지 않았다. 섬세하게 층을 쌓듯 색조를 더하는 손길이 낯설고 낯설어 눈썹을 그리고 속눈썹을 섬세하게 돋우는 브러쉬의 행로가 도리어 익숙해져 그곳에만 온 마음을 빼앗길 따름이었다.

　“그리고 익숙하고.”
　“칭찬인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후, 하는 한숨과 함께 이카본은 웃었다. 무대 위로 올려보내는 배우를 대하듯 건조한 대응이었다. 아마 평소의 모르간이 상대였다면 그리 말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모르간은 붓끝을 가다듬으며 연지를 찾는 이카본의 손을 바라보았다.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 다만 앞을 보았으므로 눈에 들어오는 상은 희고 가느다란 손이 섬세하게 붓의 올을 세우고, 품이 넓은 셔츠를 삼키고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인 검은 바지가 몇 번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뿐이었다. 특정한 의미를 갖지 않을 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에 드는 연지를 찾은 이카본이 허리를 굽혀 가까워지면서 눈높이가 맞물렸다. 자못 키스를 하려는 양 그 자신도 모르는 새 벌어진 입술과 함께 붓이 민감한 아랫입술에 닿았다. 이제껏 닿았던 더운 체온과 달리 연지를 적신 붓은 지나칠 정도로 서늘해서, 모르간은 저도 모르게 의자의 팔걸이를 쥐었다. 간지럽니. 어쩌면 그리 물어야 마땅했을 순간에도 이카본은 말없이 신중하게 붓을 재차 몇 번이고 가다듬으며 입술 선을 따라 색을 채우고 선이 흐려지지 않도록 강조했다.
　본래 입술이 띠는 색과 정반대의 색이다. 처음 고르는 것만으로 이미 대담하기 짝이 없는, 오로지 연출만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본디부터 아무것도 칠하지 않아도 충분했을 입술 위로 색을 입히며 입꼬리마저 사뭇 형태를 새로 갖춘 듯 변했다. 처음으로 연출에서 아름다운 것을 좇듯 연한 푸른빛의 연지가, 붓끝이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생기를 입고 호흡을 뱉었다.
　크리스마스로즈와 매그놀리아의 부드럽고 따뜻한 향과 함께, 마침내 모르간이 사뭇 ‘모르간답다’고 말하게 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