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현자님과 수모는 참지 못하는 여왕님의 법칙

서버페스2, 브리스틴에서의 이카본과 모르간

 

 

　“정말로 모르간 폐하는 범인이 아니었다고요?!”
　“내가 보증할게.”

　후지마루 리츠카는 잘 모르겠다. 늘 옳은 말만 하는 현자와 늘 흑막으로 있어야 맞을 듯한 서번트 중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하지만 보증까지 필요할 정도로 믿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고, 반대로 저런 사람이 구태여 보증까지 하겠다고 나서니 더 수상쩍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리츠카는 머리를 부여잡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범인 추리는 이쪽에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누구예요? 현자님은 아시죠!”
　“아니? 모르는데.”
　“거짓말~!”

　왜 전부 아는 사람이 하필 이런 것만 모른다고 하는지. 호텔 로비에서 채신없이 절규하는 리츠카를 두고도 이카본과 모르간 모두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어느 쪽인가 하면, 리츠카를 상대하는 것은 이카본뿐 모르간은 멀찍이서 이카본과 리츠카를 물끄러미 번갈아 볼 뿐이었지만.

　“하지만 정말이야. 알려고 하지 않았거든.”
　“아니, 어째서요? 계속 리셋하는데 궁금하지도 않았어요?”
　“그야, 알아서 바뀌는 건 없으니까? 기본적으로 나도 모르간이랑 있을 거고. 만족할 때까지.”

　리츠카는 본능적으로 흘긋 모르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도 태연해서, 생략된 주어를 알 것만 같았다. 말하자면, 그는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브리스틴에 있을 작정인 셈이다. 애당초 리츠카가 레포트를 쓸 때만 해도 두 사람이 휴가 명목으로 나란히 레이시프트하는 모습을 보았으므로 놀랄 만한 말도 아니긴 했다.
　모르간은 이제 지켜보는 것도 지겨워졌는지 리츠카와 이카본을 내버려두고 몸을 돌렸다. 프라이빗 비치 쪽으로 나가며 내어놓고 이카본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썩 못마땅한 듯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리셋에 휘말린 리츠카가 브리스틴으로 날려오자마자 모르간은 대뜸 잠자는 숲속의 왕자를 깨우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으므로 그가 이제까지 모르간이 원하는 만큼 어울려주지 않았노라고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그런데도 그는 냉큼 모르간을 뒤따르기는커녕, 여남은 말을 전부 할 셈인지 리츠카에게 속닥거렸다.

 

　“하지만 도와줄 수는 있어. 난 이 섬의 바다눈…… 아니. 바다는 흥미가 있어서 조사했지만, 알기 직전에 관둬버렸어. 거긴 찾아볼 만한 곳이 아니더군.”
　“바다 빼고 전부 조사하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하하, 설마. 요제프라는 이름을 대고 섬의 방문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봐. 서번트들 말고. 친절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다들 대답해줄 거야.”

　리츠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치, 비로소 원하던 말을 듣게 된 사람처럼. 동기부여가 될 대로 되었는지 그는 해변으로 향하는 이카본의 뒷모습에 대고 몇 번이나 꾸벅 인사하며 소리쳤다.

　“요정국 때처럼! 네! 고마워요!”

 

　해변으로 나오자, 햇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청량하고 강렬했다. 호텔 밖으로 걸음을 내딛자마자 내리쬐는 볕이 뜨거워 무심코 손을 들어 차양을 드리우게 할 정도였다. 이카본은 걸음을 재촉했다. 남국의 태양이라니. 조금 볕을 쐬는 것만으로도 후덥지근했다. 그래서 그간 오전 늦도록 늘 객실에만 머무르거나 깰 새도 없이 잠들어 있었음에도, 사랑스러운 그의 부인은 곱씹을수록 영 심통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파라솔 아래에서 모르간은 선베드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표표히 밀려왔다가 모래를 적시고 쓸려내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잠자코 잔을 기울이며 가지런한 속눈썹 아래로 그늘이 드리웠다. 테이블에는 마카롱 타워에 그를 위한 칵테일 잔 하나가 더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들의 종류 하나하나를 미리 지정해두지 않았다면 그만치 신속하게 준비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녀는 마카롱 타워에서 마카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카본이 가장 좋아하던 민트초콜릿이었다. 청량한 민트색에 초콜릿 코팅을 덧입힌 것을 손끝으로 구슬리듯 이리저리 기울이더니, 이카본이 가까이 다가오자 입으로 가져갔다. 정말이지 보란 듯한 행동이었다. 답잖게도. 이카본은 미미한 웃음을 띤 채 반대편 선베드에 걸터앉았다.

　“내가 근 몇 주 내도록 곁을 지킬 때는 잠든 얼굴만 보여주더니 저 소년이 오자 일어나는군.”
　“토라졌니?”

　이카본의 손가락 끝이 물이 맺힌 칵테일 잔의 표면을 따라 내려갔다. 꼭 그만큼의 사이를 두고 모르간의 눈길이 이카본에게 가 닿았다. 불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보는 것보다는 이쪽이 그녀에게 더 그럴듯한 구경거리였을 텐데도, 그리 오래지 않아 눈길은 다시 해변으로 향했다. 심사가 단단히 뒤틀렸음을 숨길 염도 나지 않는 듯싶었다.
　브리스틴을 열 때부터 그녀 외의 사람은 한 명도 오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일랑 찾을 수 없는 구역을 샅샅이 훑던 눈이 곧 풀어졌다. 어깨에서마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 오래지 않아 질리고 만 모양이었다. 모르간은 가니쉬로 올라간 체리에 대단한 흥미라도 생긴 양 칵테일 잔을 향해 말을 걸었다.

　“잠든 얼굴을 보는 게 싫었던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천문대에서 너와 침대를 나누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 깨어 있는 모습을 통 보지 못해 행여 더위라도 먹었나 싶어 간호했지만. ……그간 이마를 짚어줄 수도 있었지만.”

　모르간은 칵테일 픽으로 칵테일을 무신경하게 저었다. 잔 안에서 산호색이 도는 민트색 칵테일이 빙글빙글 돌아가자 보그르르 올라오는 기포가 한숨 소리 대신 터지는 듯했다. 아마 블루 코럴 리프일 것이다. 싫어하지는 않을 테지만, 명백히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다.
　마카롱만큼이나 부러 고른 듯한 선택에 이카본은 가만 웃으며 비로소 칵테일 잔을 들었다. 토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지만, 그는 새파란 블루 라군에서 정량을 초과해 채운 보드카의 알코올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카본이라면 아마 채 반도 비우기 전 모르간에게 부축받아야 할 신세가 될 터였다. 토라지지 않았기는. 그는 역시 그녀의 앞에서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듣는 사람이 없는 야외에서 함께 걸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될 수 있다면 보는 눈 없을 해변에서 비치발리볼도 해보고 싶었다. 이 뜻인가?”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을 샅샅이 헤집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르간은 애꿎은 칵테일만 들쑤시느니 차라리 이카본에게 보이도록 한숨을 내쉴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박정한 남자 같으니, 쏘아붙이는 말과 함께.

　“여자의 자존심을 늘 걸레짝으로 만드는군…….”
　“하하,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니? 휴가 기분이란 건 대단하네~.”

　이카본은 선베드에서 일어나 모르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레몬과 체리를 꽂은 칵테일 픽을 집어 들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가자, 예상과 달리 모르간은 순순히 입을 열어 체리를 하나 더 받아먹었다. 그제야 모르간은 글라스에서 눈을 떼곤 잇새로 칵테일 픽 끝을 문 채 이카본을 올려다보았다.
　얄밉게도,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만 놀릴 때가 되었노라고 시인하는 말씨가 언어 대신 웃음에 깃들어 있었다. 강짜를 부린다면 입안의 혀처럼 굴며 그녀를 어르고 달래줄 테지만, 토라진 티를 내어 그가 부탁을 들어주게끔 할 때는 지금이 아니었다. 대신 질리지도 않은 것을 질렸다고 저어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이카본의 손을 밀어내었다.

　“셔츠가 말려 올라가는 것도 모르고 뒤척이는 너를 구경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제아무리 네 부주의함이 빈번하대도 나쁜 구경거리는 아니었지. 천문대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도통 가벼운 차림을 모르니…….”
　“날 돌보느라 한숨도 안 잔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누구라도 사나흘씩 잠만 자면 그리 말하게 될 게다. 멜뤼진은 용이라지만, 너는 동면이 필요 없는 인간 아니냐. 인간 남편을 들이면서 용의 생체시각을 맞춰야 한다고 상상한 적은 없다.”

　……그러니 하나하나 뜯어보면 날 걱정하고, 날 사랑한다는 말이잖아…… 이카본은 구태여 모르간의 말을 해체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뒷감당할 수 없는 것 앞에서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는 재주가 있었다. 다만 그는 고개를 수그려 순순히 모르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반응은 자연스러웠고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드러난 어깨의 살갗에 손이 닿을 적에는 언제고 불에 데는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고, 입술이 닿을 적에는 익숙한 상대조차 새로이 갈망하듯 고개가 기울어졌다. 달래듯이 사근사근하게 키스가 반복되자 비로소 모르간은 손을 뻗어 이카본의 잔을 가져갔다. 모르간은 햇빛에 비춰보듯 잔을 기울이며 느릿느릿 돌리기 시작했다.
　종류나 의향 한 번 묻지 않은 채 그녀의 손끝에서 내용물이 변했다. 색은 변하지 않았으나 잔을 가져갈 적에 훅 끼쳐오는 알코올 냄새가 가신 것을 보아하니 심통은 이제 끝인 모양이었다. 이카본은 모르간에게 잔을 받아 건배하듯 장난스럽게 그녀의 잔에 제 것을 부딪쳤다.

　“대신 받아야 할 것은 받아야겠다. 내 바캉스에서 네 ‘휴가’를 참아주었으니, 바캉스 기분일 때에나 줄 수 있는 것을 다오.”
　“이를테면 어떤?”
　“너는 늘 스스로를 ‘나私’라고 말했으니…… 내 옆에서 ‘나僕’라고 말하는 너라거나. 꽤 구미가 당기더구나, 그 말.”

　모르간에게서 들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었다. 이카본의 고개만은 태연하게 기울어졌지만, 되물음은 의아하게 쏟아졌다.

　“어라, 나僕라고? 여섯 살 때도 그런 말은 안 썼는데?”
　“그래서.”
　“……흠.”

　바캉스 기분이란 이런 건가. 이카본은 칵테일 잔을 기울였다. 몇 모금 마시면서, 몹시 어려운 부탁이라도 들어주는 것처럼 말을 아꼈다. 모르간은 어느새 다시 이카본에게서 눈을 돌린 후였다. 마치 당연한 제 것을 가져가는 것처럼 요구해도 좋으련만 언제고 저 스스로 말하고선 거절당할까 염려하는 얼굴이 된다니. 이카본은 가만히 모르간의 뺨을 간지럽혔다. 칼데아였다면 노골적인 애 취급에 손이라도 쳐냈을 텐데, 오늘은 눈매를 누그러뜨린 채 가만히 손길을 받고만 있는 모양새가 답잖게도 썩 온순해 보였다.

 

　“내기 판돈으로는 어때? 어스맨 레이스에서 누가 우승할지.”
　“나는 이미 멜뤼진을 대리로 참석시켰다만. 그 소년을 경품으로 내걸었으니, 나보다는 그녀가 더 열을 올릴 것 아니냐.”
　“응, 뭐. 대리 참전도 좋아. 열어서 멜뤼진이 우승한다면 하와트리아에서는 나僕라고 말할게. 뭣하면 당신을 아가씨라고 불러도 좋고? 구미가 당기지?”

　모르간은 제 뺨을 매만지던 이카본의 손을 쥐었다. 그리곤, 말을 돌리거나 뜸을 들일 구실이 없는지 천천히 몸을 쓸어 올라가다가 금빛 고수머리를 걷으며 이마를 짚었다. 아주 엷게만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늘이라 한들 그 같은 남자에게 한낮의 열기는 도무지 견딜 만한 것이 못 되는 듯싶었다. 이카본 또한 구실을 지적하는 대신 더위를 식히듯 순순히 모르간의 손에 제 뺨을 부비적거렸다.

　“내 생각엔 리츠카도 참가할 것 같아. 그리고 우승하겠지.”
　“그는 경품이라고 했다. 다른 서번트들이 레이스에 목매달 만한 경품은 그 외에는 없잖느냐. 동부의 일에 정신 팔린 작자가 레이스에 참석할 리도 없고.”
　“뭐, 불참해서 내 예상이 아예 빗나간다면 당신에게는 좋은 것 아니니? 그만한 배당률이 보장돼야 할 만큼 나도 당신에게 받고 싶은 게 꽤 크단 말이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크긴 큰 모양이지. 들어나 보자꾸나.”
　“당신이 서버페스에 책을 한 권 내면 좋겠어.”

　대번에 모르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당찮은 말이다, 과연 불가능한 청이다, 들어줄 가치도 없으니 없던 일로 하겠다, 개중 무엇을 골라야 단칼에 거절할 수 있을지조차 가늠되지 않을 조건이었다. 기실은, 그 이상으로 이카본이 원할 법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세속적인 행사에 좀처럼 관심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리츠카는 비밀로 하려고 했다는데…… 바반 시가 숲속에서 책을 쓴다고 했어. 어머님께 비밀이라고 했지, 나한테 비밀이라고 한 적은 없다면서 살짝 가르쳐줬거든.”
　“그래서.”
　“물론 난 그런 행사에 관심 없어.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쓴 것을 읽는 건 즐거워.”
　“……바반 시와 내가 나란히 한 권씩 쓰라는 건 경쟁을 붙이겠단 말과 다르지 않은데.”
　“설마. 바반 시와 같이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참이야. 당신이 부재한 사이 브리스틴 관리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분신을 활용해도 나쁘진 않겠지. 몇을 끌고 가도 좋아. 당신 마음대로 해. 마감에 맞추되, 단, 바반 시가 하는 게 당신 눈에 차지 않는다고 혼자 대신 쓰는 건 안 돼.”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조건들에 모르간은 자못 못마땅한 듯 낮은 침음으로 목을 울렸다. 역시 단칼에 거절하고 싶을 때만큼이나 말들이 한꺼번에 치받쳐 올라왔다가 뱃속으로 가라앉았다. 바반 시의 행방을 언제부터 알았는지,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알고도 함구했는지 쏘아붙이려던 말이 쉬이도 가라앉는 것은 전부 저 싱긋 웃는 얼굴에서 묻어나는 호의며 애정이 썩 싫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모르간은 이카본이 제안한 내기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의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레이스에 정말로 후지마루 리츠카가 참가한 일이나, 정말로 우승하게 된 일이나, 인류 최후의 마스터를 미끼상품으로 걸면서까지 남편에게서 애 같은 말을 며칠 듣고 싶었던 임금님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음을 개탄하다 자그마한 요정의 실수로 바다눈노스가 일어나버린 일 따위는.
　중요한 것은 일련의 사소한 일들이 지난 후 모르간이 내기에서 지고도 사근사근하게 웃는 이카본에게 결국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것을 다루는 듯한 키스를 받을 적에 뒤따라오는, 그,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소곤거리는 말을. 숲에서 돌아올 때쯤엔 우선순위를 정리해두세요, 아가씨. 저僕와 뭐부터 하고 싶으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