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취는 에티카를 덮는다

소돔은 에티카와 떠나며 후편, 이카본과 부친의 정부 모르간

 

 

　당신을 그리워하며 내 인생은 흘러가는군요. 편지 서두조차 여자는 아름다웠다. 펜을 오래 대어 번진 실금들과 망가진 첫 문자. 그리고 담담히 맺은 문장. 그 뒤로는 여자가 썼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리멸렬하며 목적과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문장들 일색이었다.
　그날, 부친의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온 내게 여자는 불쑥 말했다. 죄송했어요. 그때는 제가 어려서, 경우를 몰랐어요. 여자가 내게 처음 한 말이었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우두커니 응접실에 마주 앉아만 있던 사람에게, 지난 며칠 여자의 이름을 호명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던 사람에게 여자는 오랫동안 해야 했던 말을 참아왔던 것처럼 말했고 곧장 입을 닫았다. 고작해야 그 경우 모르던 시절로부터 만 십 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여자는 그때를 가리켜 어렸다고 말했다. 여자의 입에서 장례식과 장례식의 차이와 참석지 못한 장례식과 참석지 않아야 했던 장례식의 구분이 사그라들었다. 몇 해의 시간과 부재는 다만 언어를 겨누면서 삽시간에 지워지고, 여자가 내 양친의 죽음을 모두 지켜보았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문득 생각했다. 그때, 조금만 더 말했다면, 여자는 오늘 부친 편지 같은 말만을 두서없고 지리멸렬하게 늘어놓지 않았을까. 손아귀에서 와삭거리며 떨리는 종잇장을 재차 움켜쥐자 나는 참아내었던 말을 적을 때 망설이던 펜 끝과 응접실에서 새어 나갈 말을 뗄 때 잠겼던 음성의 동일성 따위를 무가치하게 생각했다. 여자의 말과 글을 서로 연결짓게 하던 지리멸렬함과 두서없음과 번잡스러움과 진솔되지 못함과 망설임의 문제에서 나 또한 결백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여자에게 살아달라고 말했다. 어째서였는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순간의 기억조차 생생하지 않았다. 그만치 강렬한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음에도, 기이하게도 기억은 명확하게 언어화되지 못했고 정리되지 않은 채 부산스러운 이미지들만으로 남아 박제되었다. 여자의 바래버린 창백한 머리칼. 어떤 두서없음으로 인한 것인지조차 묻지 않던 색소 옅은 눈. 유예를 물을 때의 단정한 입매. 고요하게 내쉬던 날숨. 여자의 말은 두서없을 때조차 반드시 겨누어야 할 것만을 겨누었다. 제멋대로 나온 말에 농으로도 그것이 나와 함께 살아달라는 것이냐 묻지 않았고 뒤따라 죽을 것만 같더냐고 묻지 않았다. 유예만을 물었고 오로지 단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날더러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실감했노라고 말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칼로 치듯 잘라내던 그 말씨는, 처음 여자와 이야기할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말씨였다.
　그러므로 이제 와 여자가 말이 길어졌다면 부쳤던 편지 같은 말을 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그날 그때는 여자를 알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또는 내가 그날의 여자와 지금의 여자를 온전하게도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방증일는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되었건 눈이 내리던 날 이 집으로 들어왔던 여자와 눈이 내리던 날 집으로 돌아온 내가 보았던 여자가 서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으니 구태여 어느 한쪽을 고를 필요는 없을 터였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
　부친의 장례식이 끝난 날, 여자는 집을 나갔다. 사용인들이 유언장에 기재되지 않았던, 여자가 이곳에 머무르는 수년간 썼던 물건을 트렁크 가득 실어 전송 없이 떠나보냈다. 내 아버지가 여자에게 안겨준 것은 한 장 서류조차 필요치 않은 보석과 옷뿐이었다. 내 아버지는 갖고 노는 장난감을 꾸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난감은 장난감이었다. 장난감은 유언장에 기록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대체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변호사와 머리를 맞대고 작성하는 공적 문서에 장난감의 이름 따위를 거론하겠는가. 누구도 놀라지 않았고, 누구도 아버지의 괴상한 취미를 속살거리지 않았다. 내가 만 열 살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먼 친척에게까지 시시콜콜하게 자신의 소장품을 남기고 사랑을 담은 흔적을 전하는 그 길고 긴 유언장의 끝머리가 다가올 때까지, 여자는 우두커니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자의 이름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유언장에 적힌 글이 음성으로 밝혀질 적마다 여자를 흘끔거리는 시살스러운 눈길만이 노골적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등 뒤로 달라붙었던 소란스러운 말을 떼어냈다. 그 말들은 집을 나가는 여자의 등 뒤로 고스란히 달라붙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작자들은 저들의 입에서 나올 말의 수를 정확하게 계량하여 한 치의 모자람 없이 여자의 앞에서 속살거렸다. ……세상에 유언장에 이름도 없었는데 별장까지 뜯어냈다는군요…… 달라는 대로 줬다는데요…… 그 댁에서 인연을 끊는 값으로 별장 하나 정도면 푼돈이니까…… 그 노이만 씨처럼 시끄러워지지 않아 무척이나 다행인가 봐요…… 전해 듣는 말에서 구분되는 거짓과 하지 않은 말과 했던 말과 진실이 우스워 나는 때로 웃었고, 때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커크웰의 별장에 들어간 후로 두문불출하자 퍽이나 아쉬워했을 얼굴들이 선명했다.
　여자를 동정했느냐면, 아니라 말할 테지만, 그 또한 동정인 이상 동정일 것이었다. 나는 다만 여자의 불분명해질 거취와 삼켜도 삼켜지지 않을 생계를 심려했다. 아니 그것만을 심려했는지 이제 와서는 알 수 없었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당신이 이곳에서 지내겠다면 내가 나갈 터이니 이 집에서 살겠느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생전 듣지 못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여청하고 현기가 도는 푸른색이었다. 그리고, 다시 불쑥 말은 터져나왔다. 터콰이즈 블루였던 것 같았는데. 영락없이 영문 모를 사람을 앞에 둔 꼴이라 여자는 눈을 굴렸다. 뒤늦게서야 이곳에서 지내지 않을 셈이라면 있을 곳을 마련하겠노라고 덧붙일 수 있었다. 그때, 여자는. 아주 조금만 목이 메었던 것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흘러나온 말은 해묵은 먼지를 털어낸 말이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친절하시네요. 칠 년이 지나 다시 들었을 때의 음성은 여전히 매끄러웠고 또렷했다. 더 이상 청량하지는 않았다. 이제 와 그것이 다시금 나를 뜻 모르게 비참하게 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여자는 이유를 물었다. 답하지는 않았다. 답하지 않은 것과 답하지 못한 것이 서로 구분되어지지는 않았으나 여자는 알 길이 없었으므로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남겼다. 나는 그저 여자에게 일 년만을 살아달라고 말했다.
　일 년의 유예는 무게감 없었고 입 밖으로 나오고도 표요하게 여자에게 닿지 못하고 떨어졌다. 버릇처럼 외국의 호텔에서 닿지도 않을 어머니의 침실 내선 번호를 누르다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했던 말이 영문 모르게 혀끝을 맴돌다 기어이 나온 말이었다. 혀를 깨물더라도 여자에게 그 뜻 없는 서두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울도록 외롭지는 않을 것이오며 보지 못한 곳을 두루 살피고 돌아가겠습니다. 번번이 말의 반 토막은 달리 말하고 달리 설명되었을지언정 서두만은 번번이 같았던 말보다도 여자의 영문 모를 얼굴을 마주하는 쪽이 더 견디기 쉬웠다. 이윽고 여자는 듣지 못할 이유 대신 의문문으로 감상을 남겼다. 그런 약속을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던가요?
　이번에도 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말 하나 오가지 않고도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커크웰의 별장을 찾았다. 런던에서 커크웰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첫 발걸음조차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듯해 떼었던 걸음이었다. 여자는 별장에서 혼자 있었다. 커크웰 별장에는 언제고 생활에 무리가 없도록 관리인들이 있었으니 어찌 지내는지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그로 인해 말이 곤궁했다. 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은 여자도 알았고 관리인들도 알았으므로 오로지 나는 런던에서 머무를 때 나만을 조심해야 했다.
　이틀을 머무르는 동안 나와 여자는 할 말이 없어 우두커니 마주 앉아만 있었다. 이틀째 밤이었는지 도착했던 날의 밤이었는지 사용인이 여자는 언제고 저 응접실의 창가에 앉아 창밖만을 내다보더라고 말했다. 그 말에 무엇인가 대답했어야 했던 것 같았는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여자가 저택에서도 그랬는지 내 아버지가 여자를 찾지 않는 동안 저택에서 여자는 무엇으로 시간을 보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입에 올려봐야 즐겁지 못할 사람 사이에서, 내가 먼저 입에 올린 일 년이라는 유예가 처음으로 버겁고 견디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다.
　두 번째 방문에서조차 나는 반 시간을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날이 풀릴 즈음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갑작스럽게 눈이 몰아쳐 비행기가 연착한 탓에 자정 무렵이 다 되어 도착한 날이었다. 이야깃거리를 빌미 삼아 선물을 가져올 만큼 나는 여자와 친밀하지 않았고 여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여자는 불쑥 말했다. 당신이 언제쯤 오나 날이 저물 때까지 응접실 창가에 앉아 있었어요. 다만 사실을 그리 전할 때 흘러나오는 종류의 음성이었다. 고요했고 버석거리지 않았으나 젖어 있지도 않았다. 내가 여자에게 대답지 않은 것과 못한 것 사이의 다름을 가늠할 적에는 결코 흘러나오지 못할 음성이었다. 나는 여자 때문에 조금 웃었고, 조금 울었다. 번번이 마음을 앓는 것은 나였음을 자백하듯.
　그날, 나는 처음으로 여자와 함께 잠들었다. 두 사람이 잠들기에는 비좁았고 한 사람이 잠들기에는 황량한 침대였다. 안아보면 여자는 한 움큼이었다. 여자는 키가 작지 않았다. 말쑥하게 자라 그저 내려다보기 좋았고 보폭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 꽃이 채 피지 않은 정원을 함께 걷기 좋았다. 그래도 안아보면 여자는 한 움큼이었다. 잠든 여자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그것만은 여자가 어렸을 때도, 지금도 변하지 않았으리라고 막연히 나는 상상했다.
　꼭 한 달에 한 번씩 커크웰의 별장으로 찾아가며 나는 막연하게 꿈을 꾸었다. 꿈인지 소망인지 망상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처음부터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거덜 났다고도 할 것 없는 빈 곳을 고백하는 것이 열없고 부끄러워 다만 꿈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자와 바르샤바에서 겨울을 보내는 꿈을 꾸었다. 오래된 전망대에서 시내를 내려다보고 쇼팽을 들으러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필하모닉까지 보폭을 맞추어 걷는 내내 어느 누구 한 사람 아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어느 누구 한 사람 아는 말로 아는 체하지 않는 꿈을 꾸었다. 그곳이라면 울도록 외롭지는 않을 것이오며 보지 못한 곳을 보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노라고 여자에게 말할지도 몰랐다. 혀를 깨물더라도 하지 않을 말의 서두를 그곳이라면 말하더라도 죄스럽지 않을지도 몰랐다. 발설하지는 않았다. 나는 여자가 나와 함께 어느 누구 하나 아는 이 없는 곳으로 함께 가주기를 바란다고는 한 치도 생각지 않았다.
　초여름에 나는 여자에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공항에서 나와 대기하던 운전수를 찾자마자 비가 쏟아져 셔츠를 온통 적셔 백화점부터 들러야 했던 날이었다. 어쩌다 늦었나요. 도착 시각을 전해 들었을 여자가 물었을 때 나는 손수 끌고 왔던 캐리어도 놓치고서 옹알이처럼 웅얼거렸다. 당신에게 형편없는 꼴은 보여주기 싫어서. 여자는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아주 조금 웃고선,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졌다. 서늘하고 부드러웠다. 살갗이 앳되어서 닿을 때의 감촉이 저도 모르게 애틋하다고 착각하게끔 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 않음을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주워섬기던 말 앞에서 여자는 한 번도 들어보리라 생각지 못한 말을 듣는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함이므로 다이아몬드를 고르지 못했다. 그 많은 말로 보석과 현실성을 연결지으려 하던 부티크의 사원들도 영원하지 않을 보석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나는 여자가 고개를 수그려 반지를 내려다볼 때 불쑥, 불쑥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기던 것처럼 영원하지 않은 보석의 이름을 일러주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고, 여자는 무엇인가 묻고 싶은 것처럼 말하려다가 곧 입을 닫았다. 혀를 깨무는 한이 있더라도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여전히 내 어머니의 얼굴 위로 천을 드리웠던 집에서 먹고 잤고 내가 여전히 내 어머니가 여름을 나던 곳에서 여자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을 나는 매 순간 알았고 매 순간 보았다. 내가 여자에게서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을 터이니 그깟 것 정도 비교되는 장사도 아닐 터였다.
　여자는 내가 별장에 머무르는 동안 때때로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투명하게 빛나는 보석 알과 함께 느른하게 손가락을 감싸며 굴리거나 돌려보기도 했다. 내 아버지와 사는 내내 아버지가 여자를 치장하고 그럴듯하게 가지고 놀며 여자의 손가락을 비워두었는지 어땠는지 나는 이제 와 알 길이 없었다. 묻기에도 참으로 겸연쩍은 일이었다. 다만 말하다 문득 돌아보면 여자는 때때로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어서, 나는 어느 쪽이건 중요하지 않아졌다. 여자에게 사랑하지 않으면서 별장에 찾아오는 연유를 책망받지도 않았고 용서받지도 않았으나, 여자 또한 나를 사랑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랑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말이란 처음부터 언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었다. 나와 여자는 스스로 어휘를 협량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이 가물거리며 넘어가다가도 한창이던 시기였다. 내 아버지가 유언장에 적었던 명의를 모두 이전받는 데는 그다지 이견도 없었고 무리도 없었으므로 한가로울 수 있었으나 새 경영인을 찾는 일이 말썽이었다. 회사의 주주들은 아버지가 그랬듯 나 또한 전문 경영인을 두는 데 찬성했으나 정확한 경영인의 후보 인명들이 거론되면서부터 이전투구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 연유를 합리성으로 포장해 저마다 다른 연유로 다른 인물을 반대하고 나섰다. 언제까지고 미국에서 터콰이즈 블루의 캐딜락이 돌아다닌다는 사유로 입국과 동시에 출국할 만한 여유를 부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나 이런 일은 정말이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밤이면 밤마다 골머리를 썩였고 낮에도 이리 불려다니고 저리 불려다니며 휘둘리기 일쑤였다.
　그 무렵 나는 커크웰의 별장으로 가는 걸음이 뜸해졌다. 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그리고 가을은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지나갔다. 행여라도 소문이 새어 나갈까 걸음 한 번 할 적마다 스스로 저어하고 그마저도 하루 이틀을 넘기지 않은 채 도망치듯 빠져나오기 일쑤였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맹세코 여자에게 질렸다든가 새삼스럽게 어머니 앞에 죄스러운 것과 여자를 놓지 못하는 일이 표리부동한 짓임을 깨달았다는 자질구레한 사유 때문이 아니었다. 시월 무렵에는 정말이지 자정 무렵이면 전화 한 통 받지 않고 잠들 수 있는 게 소원이었다. 오로지 그리도 분주해서, 겨를이 없었고 경망스러울 정도로 시간을 낸다는 일 자체가 곤궁하게만 느껴졌다.
　여자는 내가 두 달째에 커크웰로 찾아들었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심경의 변화도 그 어떤 것도 달리 묻지 않았으며 거르고 찾지 않은 달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마치 나는 지나간 달 이미 여자를 찾았고 이번 달에도 여자를 찾은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 질문의 공백이 불편하고도 편안했다. 그래서 내게 궁금한 것이 없느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모르기를 원했으므로 여자는 몰랐다. 그것이 여자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호의인 듯싶었다.
　여자가 편지를 보낸 것은 한 해가 갈 무렵이었다. 편지는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도착했고 후보를 확정하고 이듬해 있을 경영인의 취임으로 며칠째 회사며 집안이 온통 소란스럽던 때였다. 글자가 일사불란하게 놓인 필체로 두서없고 지리멸렬하게 문장을 이어가던 편지는 회의실의 소란에도 단숨에 읽혔다. 여자의 말이 기다림과 그리워함 가운데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렸는지 매달리게끔 했고 아마도, 기다리며 흘러간다 말했대도 결국은 여자에게 달려갔을 테지만, 그리워한다는 말에 엉망진창으로 흩어진 어절과 형태소의 파편을 주워 담게 했다. 그 모든 것이 여자가 내가 모르기를 원했으므로 모른 것이 아니라 발설치 않을 때까지 알려 하지 않았음을 고지했다. 일 년이라는 유예가 적혀 있지 않은 글에서 일 년의 유예를 읽었다.
　여섯 장이 넘는 편지를 모조리 읽자마자 회의실을 뛰쳐나왔다. 편지의 서두에 적힌 글 말고는 무엇이 어떤 의미로 적혔는지 어떤 문장과 어떤 구와 절이 얽혔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서, 나는 짐도 챙기지 못하고 눈도 피하지 못하고 커크웰에 도착했다. 정문에서부터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온 차에서 뛰어내렸을 때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쌓여 내가 대체 어디에 온 것인지 깨달았다. 눈이 어깨를 덮도록 내리는 한겨울에 처음으로 땀에 젖어서, 나를 맞아들이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클랙슨 울리는 소리에 손수 현관으로 나왔던 여자는 나를 보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여자는 조금 울었고, 조금 웃었다. 처음 여자를 안고 잠들던 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인생이 어디서 몰락했는지가 중요하던가. 내 인생이 어떻게 몰락했는지가 중요하던가. 내가 몰락을 스스로 택한 사실만이 여자에게 가 닿았음을 알았다. 장사 지낸 주검에서 시취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