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정원으로 오라

잘랄루딘 루미, 동명의 시.
FGO 엔딩 이후, 바르샤바에서 겨울을 보낸 이카본과 모르간

 

 
　“매일 아침마다 하농 한 권을 통째로 친다더라고.”
 
　피아노 앞에 앉은 이카본이 반쯤 질렸다는 얼굴로 모르간을 돌아보았다. 한 번도 펴보지 않았던 바흐 인벤션을 뒤적거리다 말고 흘긋 그를 곁눈질했으나, 머잖아 다시 악보로 시선을 주며 되물었다.
 
　“그 피아니스트가 그런다던?”
　“아니, 꼭 그 사람만 그런 건 아니라. 전공생들은 다들 한 번씩 거쳐 간다는 모양이야.”
　“……네가 요정국 브리튼에 체류할 때 피아노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 없어 다행이로군.”
 
　생각하는 것만으로 질린 쪽은 모르간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태도가 영 내키지 않는 듯했고, 이카본 또한 짤깍짤깍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대신 도리질 치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를 반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 개월 전 이카본은 처음 하농을 펼친 뒤 정확하게 악보의 지시사항을 지켜 5번까지 치고 난 뒤 이렇게 코멘트했다. 못 해 먹겠군.
　그러나 삼 개월이 지나고 나니 익숙해진 탓인지 실제로 실력이 나아진 탓인지 썩 듣기 나쁘지만도 않았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바르샤바에 있는 별장에서 겨울을 보낸 반년가량, 이카본은 피아노를 배우는 데 재미를 붙였다. 애당초 바르샤바에 별장을 사들인 것도 전적으로 이카본이 재작년 풀 세션으로 다녀온 쇼팽 콩쿠르에 열광했기 때문이지만.
　이카본은 피아노에 기대선 채 악보를 읽다 말고 천장을 올려다보던 모르간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시선만 붙박은 채 슬그머니 고개를 수그리고 보면판에 뺨을 기댔다. 이카본이 처음 배우는 것 앞에서 곤혹스러워할 적에, 그녀 또한 퍽 흥미가 생긴 듯 교본을 놓고 건반을 두드리곤 했다. 피아노 자체에 흥미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싶을 때 보이는 눈길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썩 만족스러웠다. 그때 모르간은 이카본과 오감을 공유한 감상이 처음으로 동일하다고 덧붙이며, 다분히 연극조로 말했다. 오호통재라. 손가락이 따로 놀아야 그럴듯한 소리가 나온다니. 천문대에서의 모르간이었다면, 요정국에서의 모르간이었다면 꾸며낸대도 할 수 없을 농담이었다.
　바르샤바에서 치는 피아노는 오로지 그 때문에 즐거웠다. 이후로 종종 연탄을 치면서 엿보이는 웃음기와, 흰 건반을 꾹 눌렀다가 떨어지며 검은 리본으로 재차 머리를 고쳐 묶는 손, 말없이 악보를 들여다보는 눈길 같은 것이 모조리 느릿느릿 이어지는 듯했으므로. 이카본은 모르간이 보이는 무방비함을 사랑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무엇을 계산하듯 종알이던 모르간이 마침내 이카본에게 고개를 돌리곤 손가락으로 톡 콧잔등을 내리쳤다. 대답 대신 푸시시 바람 빠진 웃음만 돌아왔음에도 그녀는 보면대에 놓였던 교본을 가져가 피아노 한쪽에 쌓아놓으며 말했다.
 
　“그만 일어나거라. 이제 짐들도 정리해둬야 할 터이니.”
　“다음주에나 귀국하는데 벌써?”
　“다음주 귀국이니 지금부터 해둬야지.”
 
　입술을 삐죽이던 이카본의 눈이 스르르 피아노 아래로 굴러갔다가 돌아왔다.
 
　“……오늘 아침에 바반 시랑 통화는 했니?”
　“그 앤 지난주에 밀라노로 여행 갔다지 않았느냐.”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거나…… 같은 안부라도?”
　“어서 일어나거라. 오늘 당장 옷까지 꾸리라고는 하지 않으마.”
 
　이잉…… 답잖게 늘어진 음성과 함께 손을 뻗어 모르간의 허리를 끌어안곤 보면대 대신 등에 얼굴을 묻었다. 기어이 그녀의 뜻대로 할 염을 내고서도 응석을 부리는 일은 퍽 익숙해졌고, 응석을 받아주는 일도 퍽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모르간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이카본을 내려다보더니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키스해주면 좋겠다.”
　“……허.”
 
　그녀의 어린 남편은 정말이지 기도 안 차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그다지 고민할 것도 없는 일이었음에도, 괜스레 그로 인하여 고민하게 될 만큼 소곤소곤. 그러나 오래 끌지 않고 모르간은 선뜻 이카본의 앞머리를 걷으며 허리를 굽혔다.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뺨을 토닥이자 그제야 이카본이 스르르 피아노에서 일어나 교본을 챙겼다.
　응석을 받아주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이카본은 2층으로 올라가 다시 별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열어보지 않을 방을 비우고 짐을 꾸릴 때까지 분주히 움직였다. 반년 가까이 머무르는 동안 사들인 기념품이나 책이니 음악CD니 하는 것 가운데 런던까지 가져가기로 한 물건의 수가 제법 된 탓이었다. 양을 보아하니 내일은 DHL이라도 불러야 할 듯싶었다.
　비운 방을 잠그고 다시 거실로 내려오자 마침 그쪽에서도 정리가 끝났는지 모르간이 주방에서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글라스 한 잔 정도 따라 맛만 본 와인과 삼 분의 일 정도 남은 브랜디를 손에 든 채.
 
　“가져갈 만한 물건은 아니지.”
　“하지만 근시일 내에 바르샤바로 또 올 것 같지도 않은데.”
　“……음.”
 
　모르간이 짤막한 침음으로 목을 울리자 이카본은 손톱 끝으로 브랜디 병을 톡톡 두드렸다. 여행도 온 데다가 반년 정도면 모두 마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 예상처럼 되지 않아 아쉽기는 했다. 두 사람 모두 별장에까지 셀러를 둘 정도로 술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별장 관리인에게 마시다 남은 걸 줄 정도로 안하무인도 아니었다.
 
　“얼음이나 가져오마.”
　“마셔서 없애게?”
　“별수 있겠느냐.”
　“하하, 대낮부터 술이라니…….”
 
　대수롭지 않게 병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도 가당치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말끝을 흐렸던 것 같은데. 채 삼십 분도 지나기 전 이카본은 소파에 폭 기대앉아 모르간이 따라주는 대로 받아마시고 있었다. TV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녹화본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생햄 멜론 전채에 연어 카나페까지 그럴듯하게 놓아둔 채였다.
　온더락 글라스에 담긴 얼음을 굴리며 달각달각 바리톤이 소프라노에게서 눈을 돌릴 때면 홀짝이고, 소프라노가 러브레터를 쓰며 무대를 서성일 적이면 킬킬거리며 원래 소설에선 썰매를 타고 전달했을 거라느니 시답잖은 소리를 종알거리다 생햄과 함께 멜론을 걷어 입으로 가져가고, 잔을 비우기 무섭게 얼음까지 잠길 만큼 또 브랜디를 채우는 모르간의 얼굴을 끌어당겨 연신 입을 맞춰댔다. 평소였다면 딱 한 잔만 받고선 거절했을 일이었으나 이카본은 주종을 가리지 않고 따라줄 때마다 순순히 받아마셨다. 대수롭지 않은 이유였다. 어째서인지 그의 너그러운 애인은 어린 것이 취한 얼굴을 보고 싶은 것 같았고, 무방비하게 받아마실 때의 신뢰를 좋아하는 것만 같았으므로.
　2막 1장, 타티아나의 영명축일을 맞아 열린 연회에서 오네긴이 올가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던 장면이었다. 렌스키로 분한 테너가 다분히 과장된 몸짓으로 분노를 표현하자 그만 이카본은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렌스키가 곧장 무대 한중간으로 걸어가 오네긴의 멱살을 잡아채도 이카본의 웃음소리는 한정 없이 가벼웠고 실없이 모르간에게 가까이 달라붙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글라스를 기울이며 TV를 바라보던 모르간의 눈길이 이카본에게 가 닿았다. 그다지 웃긴 장면도 아닌데. 그러나 그 반응이 도리어 퍽 즐거운 듯 그녀는 눈매를 접으며 가만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중 잡지 못하고 들뜬 모습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아, 그렇지만 역시 나라도 렌스키처럼 했을 거야…….”
　“내가 너를 두고 다른 남자와 춤출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하하하!”
 
　예정된 것처럼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취기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카본은 고개를 수그려 모르간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잖아도 높았던 체온이 한껏 덥혀진 모양이었다. 그는 이미 오페라는 뒷전이 되었는지 괜히 서늘한 품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리곤 모르간의 뺨을 감싸곤 양 뺨에 번갈아 쪽쪽, 퍽이나 장난스러운 소리를 내며 다시 입을 맞춰댔다.
　부러 마음에도 없이 귀찮은 티를 내며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리거든 물러나기는커녕 쫓아와 거듭해서 입을 맞추곤, 괜히 목덜미를 꼭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모르간은 꼭 이카본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드물게도, 소리 내 웃는 게 낯설 정도로. 이미 급한 레치타티보를 따라 결투를 약정한 렌스키와 오네긴의 갈등은 그녀에게도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취하면 정말로 응석받이가 되는구나.”
　“좋아, 싫어?”
　“보자.”

　모르간은 손가락 끝으로 이카본의 턱을 들어 올리고선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보았다. 슬 가늘어진 눈매며 품평하듯 꼼꼼히 뜯어보는 태도 전부가 이미 모르간에게 이카본이 행했던 것과 꼭 같이 옮겨붙은 태도였다.
 
　“싫다고 할 이유가 있겠느냐.”
　“……그 말이 좋아…….”
 
　괜히 더 달라붙어 이카본은 모르간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쪽…… 유달리 느리고 길게 이어지는 장난스러운 소리가 뒤를 이었다. 모르간은 가만히 이카본의 양 뺨을 감싸고 시선을 견주었다. 언제고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아메지스트는 그대로였고, 다분하게도 들뜬 감정은 진실을 전해오고 있었다. 취해도, 취하지 않아도 다만 표현의 방식만이 다를 뿐 언제고 같다고 부연하듯. 불현듯 감정과 진실이 육신에 얼마나 투사되었는지 번번이 재단하던 때가 부쩍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모르간은 고개를 틀어 이카본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입술을 찾아 소리 없이 가볍게 겹치고, 느리게 호흡을 나누다가 제 품에 얼굴을 묻게 하고선 느른하게 등을 토닥였다. 이카본의 손에서 글라스를 가져가거든 순순하게 허리를 끌어안으며 체중이 실렸다. 머잖아 어떤 말도 없이,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품 안에서 숨소리가 낮아졌다. 어느새 볼륨을 줄인 오페라는 아직 2막 끝도 보이지 않았고 커튼 새로 들어오는 오후 나절의 햇빛은 가물거리며 깜박이고 있었다.

 

---

 
 
　“음…….”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그리 오래 잠든 것도 아닌 듯한데, 깨어나자마자 본 테이블은 그새 이미 말끔히 치워진 후였다. 화면이 꺼진 TV 유리에서 비친 제 모습과 턱을 괸 모르간의 모습을 께느른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모르간이 시큰둥하게 이카본의 뺨을 꼬집었다.
 
　“일어났느냐?”
　“……으음. 역시 과음했어.”
 
　이카본이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허리를 조금 더 바투 안으며 다시 폭 얼굴을 묻자 그녀는 픽 웃고 말았다. 아직 취기는 전부 가시지 않은 듯했으나, 고작 몇 잔 받아마신 술에 한껏 높아진 음성으로 웃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모르간은 이카본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넘겼다. 결이 좋고, 여성의 그것만큼이나 올이 가늘어 자주 부스스해지고 엉키는 고수머리가 제법 기분 좋게 손가락에 감겼다가 쓸렸다. 오로지 그녀만이 제 것처럼 만질 만한, 그녀를 위한 블론드였다.
　말없이 손끝으로 어루만지거든 그는 언제고 다시금 응석을 부리듯 그녀에게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언제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이 그는 그녀에게 한결같이 달라 붙어왔다. 결국 모르간은 피아노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다루듯 톡, 하고 이카본의 이마를 두드렸다.
 
　“산책이나 나가자꾸나. 술도 마저 깨고 정신도 들 겸.”
　“으응…….”
 
　이번에도 어김없이 응석은 더 달라 붙어왔다. 덕분에 이카본이 고개를 끄덕거리고선 한동안 달라 붙어 있다가, 코트를 내오기까지는 십 분가량 더 는적거려야 했다.
　볕에 덥힌 공기는 아직 쌀쌀했다. 바람이 불 적이면 서늘했고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셔 느리게 눈을 감아야 했다. 쾌청한 공기 탓에 여전히 긴 숨을 내쉬면 꼬리를 달고 희뿌연 입김이 묻어나왔다. 만개했다가 천천히 시들 준비를 마치는 크리스마스로즈, 겨울에 별장을 사들인 덕분에 꾸며놓고도 꽃을 보지 못했던 수국, 이름을 알지 못하고 관리인이 어울릴 것이란 사유로 심어둔 꽃까지 옅은 벽돌이 깔린 산책로를 기웃거렸다. 그새 아주 조금 덮인 눈을 반짝거리면서.
　찬 바람을 쐬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던 이카본이 손끝으로 크리스마스로즈를 건드렸다. 답잖은 연극적인 수사가 떠올랐다가 날려가는 잠기운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헬레보루스. 비로소 세례자가 빚어냈던 구세주에게 걸맞는 장미지. 이제 와 말하기엔 겸연쩍고, 이제 와 자각하기에는 너무나 비일상적인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수다스러운 레토릭을 입에 올리기에는 꼭 그와 같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산책로를 따라 걷는 모르간의 평온한 모습이 지나치게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의 마음에 들었다.
 
　“눈 내린 거 알았니?”
　“아까 오페라 틀 때 보니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더군.”
　“3월에 눈이라니.”
　“런던도 3월에 진눈깨비가 쏟아지기 일쑤잖느냐.”
 
　그 말까지 마음에 들었다. 다시금 기분이 좋아지고 말아 배시시 웃으니, 모르간은 퍽 싫지 않게 입매를 뭉개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술이 덜 깼느냐.”
　“오늘 내가 뭐라고 말해도 그렇게 말할 것 같아!”
 
　결국, 모르간마저 픽 웃고 말았다. 이카본이 어린아이들 앞에서 때때로 보이던 것과 꼭 닮아버린 웃음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웃음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유달리 웃음이 헤프던 이카본은 TV 속에서 흘러나왔던 오페라의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크리스마스로즈를 지나쳤다.
　예브게니 오네긴을 처음 만난 타티아나가, ‘당신의 타냐’로 러브레터를 쓰는 날의 밤만이 멜로디로 머물렀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소녀의 러브레터가 오늘만은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다. 문득, 그는 꼭 그와 같은 것을 흥얼이는 모르간의 음성을 들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나직나직하게 아리아를 흥얼거리면서 평온하게 걷는 모르간이라니. 그 예전에는 어디 생각이나 할 수 있었던가. 구세주로서 빚어냈는지 빚어내지 않았는지 따위를 논하지 않을 얼굴을 어디 바랄 수나 있었던가.
　그녀는 흥얼이는 노래가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못 박인 듯 멈춰선 이카본을 무심코 지나쳐 앞서가는 걸음에서부터 드문 유쾌함이 묻어났다. 반 블록이나 간 후에야 깨달은 듯, 모르간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의아한 얼굴로 잠시 고개를 기울인 채 이카본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잠시, 그녀는 대수롭잖게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운 마로니에에 기대 서 그를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시간이 낭비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제 눈에 깃든 것으로 살필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버릇이 물들었던 것처럼,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이 모르간에게 익숙해진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바람이 담장 너머에서부터 잠잠해졌다. 얄팍하게 쌓인 눈을 훑고 지나갔던 바람결이 잦아지고 나자 모르간은 바람의 향방을 가늠하려는 양 고개를 돌렸다. 이카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이미,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해서 염려할 이유는 더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배우가 무대에서 짙게 깔린 낙엽을 내려다보듯 고개를 수그리더니 입을 열어 자그맣게 속살거렸다. 내내 흥얼거리던 러브레터를 쓰는 소프라노의 가사를 좇아서.
　멀거니 바라보던 이카본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들었다. 거리가 멀어 희미하게만 들리는 러시아어의 악센트가 꼭 그녀답게 말라 있었다. 그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오로지 그녀만이 맺힌 상을 박제하고 싶었다. 화면 안에서 고개를 수그렸던 모르간의 시선은 무대에 장식된 낙엽 대신 피어난 잔디를 훑었다가, 음성이 잦아들며 다시 나부끼는 바람으로 향했다. 두 손가락으로 가만히 밀어당기면 얼굴은 가까워지고, 좁히면 멀어지면서 시선이 향했던 눈길을 잡아챘다. 오로지 이카본의 손에서 모르간은 실체와 피사체로서 생몰을 거듭했다.
　그 자신조차 언제였는지 모르게, 셔터음이 울렸다. 제법 거리가 있어도 고요한 정원에서는 어렵지 않게 들렸는지 모르간은 잠시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화면 안에서 그녀의 파란 눈이 그와 시선을 견주었다.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서 마주 보는 것조차 더 이상 생경해하지 않더니, 이내 모르간은 자그맣게 웃으며 렌즈를 응시했다.
　다시 한번, 셔터음이 울렸다. 어서 이리 오라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