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과 우수함 사이

우리 딸이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운다는 거예요 글쎄

 

 

　“고민이 있으니까 들어봐.”
　“한 번만 들어볼 테니까 잘 말해봐.”

　각운이라도 맞추듯 답잖은 말끝에 바반 시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걸까? 아니면 놀리고 싶었던 걸까? 애석하게도 쉬이 알 수는 없었다. 기분대로 행동하는 일이 몸에 뱄다고 한들 이카본과 같은 부류가 보이는 ‘기분대로’는 늘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이카본이 서류를 넘기건 말건 개의치 않고, 그녀는 자박자박 걸어가 소파에 폭 주저앉았다. 쫓아낼 셈이라면 쫓아내라지.
　일을 방해한 셈이었음에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뒤따를 엄한 말 대신 팔랑, 한 장 더 종잇장이 넘어갔다. 태블릿에 띄운 슬라이드까지 함께 한 장 넘기고 나자, 바반 시는 부러 태연한 척 다리를 꼬며 이카본의 옆얼굴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도드라지지 않은 밋밋한 인간의 귀가 아주 미미하게만 쫑긋 서 있었다.

　“리츠카가 그러더라. 범인류사의 브리튼 음식은 조잡했다던데, 그쪽 ‘아서 왕’한테 고향 음식은 뭘 먹여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찾아갔더니 상세하게 상담해줬다고. 현자님은 늘 그러신다며?”
　“하하, 네게 그렇게 불릴 때면 늘 부끄러워. 그건 상담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이버인 쪽의 아르토리아에 관해서는 잘 안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카멜롯 바깥 귀족 나리들이 뭘 먹었는지도 모르지 않잖아. 그 애 성미라면 알고도 안 먹은 거니까. 그래서 도울 수 있었어.”

　바반 시는 잠시 입술을 삐죽였다. 뒤따르는 근거는 전부 오로지 그만이 답할 수 있는 말이라, 상담 상대로 확실히 적합하고 알맞았다. 그녀의 물음이 과연 그때처럼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에게 적합한 질문이냐 묻는다면 쉬이 대답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였을까. 이건 이것대로 어째서인지 언짢았다. 물론 현자님은 뭐든 알고 있지, 따위의 말을 했다간 퍽 짜증을 냈을 테지만. 결국, 포오. 가느다란 한숨만 뒤따랐다.

　“어쨌든 별일이구나. 네가 나한테 고민거리를 먼저 상담해오다니.”
　“……일단 듣고, 제대로 말해. 리츠카한테 했던 것만 못한 말이면 네 머리털 다 쥐어뜯길 줄 알아.”

 

　비로소 이카본의 눈길이 바반 시에게 다가왔다.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보랏빛 눈이 곧장 눈을 마주했다가,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갔다. 오롯하게 눈을 덮은 후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늠할 새도 없이 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능변도 재치도 없이, 다만 승낙할 뿐이었다.
　그제야 떨어진 허락이 새삼스럽게 겸연쩍어 바반 시가 시선을 떨구며 제 손을 모아쥐었다. 수그린 어깨에서부터 조금 긴장한 태가 났고, 말에 앞서 오물거리는 입술에서는 퍽이나 돌아올 답변을 기대하는 태가 엿보였다.

　“어머님께 처음으로 만든 구두를 드려야 할지 잘 만들게 되면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팔랑, 또 한 장이 넘어갔다. 이내 서명이라도 하는지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그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나라면 처음으로 만든 것. 특별하잖니?”
　“제대로 고민하고 말하라고! 너 내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것도 아니잖아! 미숙한 거 드리는 게 걱정이라서 그래!”
　“잘 만들게 된 후에 주겠다고 다짐하면 평생 못 줄걸.”

　이카본의 펜 끝이 가볍게 바반 시의 뺨을 건드렸다. 꼭 그 나이만 한 아이들이 가질 앳된 보드라움과 사랑스러움을 실감이라도 하듯, 그는 아이를 대하듯 건드리고선 이쪽을 보게 했다. 천천히 그녀의 눈길이 돌아오자, 이카본은 비로소 테이블에 서류를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고개를 수그리느라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정돈해주고선 말을 이었다.

　“실력이 늘 때면, 언제나 사람은 부족한 면이 눈에 띄게 되지. 그럼 지난번엔 괜찮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지금 보면 영 어색해 보이기 시작해. 그 상태에서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한다고 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하게 될걸. 더 낫게 만들면, 더 솜씨가 좋아지면…… 하면서 미루기만 하다 끝나게 될 거야. 그런 거라면 미숙한 것이나마 먼저 선물하렴. 기뻐할 거야.”
　“……그야…… 어머님이면 기뻐해주시겠지…… 이제는, 그…… 음. 믿으니까……. 그래도 어머님께서 엉망으로 만든 걸 신어주시는 건…….”
　“하하. 설마, 그 바반 시가. 모르간에게 평생 한 켤레만 선물할 거니?”

　정말이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이카본은 고개를 젖히고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정말로 한참 어린 막냇동생이라도 대하듯 귀여워하는 웃음이라서, 바반 시는 소파에서 홱 일어났다가 제 양손만 몇 번이고 주물거렸다.
　이카본은 자연스럽게 바반 시를 좇아 올려다보았다. 창백했던 얼굴에 도는 혈색이 썩 나쁘지 않았다. 한순간 아, 하는 탄성이 터졌음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아이를 대하듯 굴지만 않았더라면 조금 더 오래 들을 수 있었을 법한데, 조금 아쉽기까지 했다. 우물거리는 태도며 순수하게 타인에게 어떤 것이 더 좋을지 고민하는 아이 앞에서 여지없이 귀여운 것을 귀여워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이카본 자신의 성미 탓이었지만.
　한껏 우물거리다가 삐죽였던 입매가 잔뜩 비틀렸다. 바반 시는 혀라도 깨무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호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지?”

　요정기사 트리스탄 경은 불쑥, 이렇게 묻고는 마스터 이카본 키르히아이젠의 방에서 냉큼 홱 뛰쳐나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