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류사 브리튼 (AUG, 2023)

유년의 뜰

 

1.
범인류사의 모르간과 결혼한 범인류사 브리튼 시기의 이카본 if…… 우서 펜드래건이 장수하게 되어서 자기 충신의 외아들이 갖는 괴이쩍은 연모 따위를 대수롭잖게 여긴다거나 해야 가능할 일이겠지.
십대초반 간신히 들어간 이카본이랑 십대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의 모르간은, 아마, 초야 때 있었던 마찰이 부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축복받으며 살아온 어린것이 부왕에게 몇 마디 속삭였다고 인생을 결정한 것만으로 부아가 치민 그녀가 내민 독배─독이라곤 들지도 않은 그저 데운 와인─라거나, 고작해야 열두어 살쯤 먹었을까 싶은 소년 주제에 내가 어떻게 당신이 나를 위해 마련한 것을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태연한 대답이라거나, 제 성질을 못 이겨 깨부순 독배로 인한 해프닝 따위의 일련의 모든 마찰을.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흙바닥에 엉망으로 흩뿌려질 애정 따위의 것들은 아깝지도 않다는 듯, 그깟 것 내버리더라도 아직도 내어줄 애정은 차고 넘친다는 듯 건네는 어린 남편의 애정으로 친자식이 말라가는 동안 친부는 친자식보다도 충신의 외아들에게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 아버지가 친부의 충신이었듯 후계자의 둘도 없을 충신이며 벗이 될 자에게. 어차피 아서라는 완벽한 후계자가 있는 이상 그의 장녀는 값비싼 ‘하사품’으로 그 가치를 다했다. 어리석게도 애정을 뿌리고 애정을 구걸하고 소꿉놀이를 한다고 들었으나, 우서 펜드래건도 이카본의 부친도 일절 그에 관해서는 참견하지 않았다. 버밀리온의 후계자는 아직 소꿉놀이를 할 만한 나이고 우서 펜드래건의 딸은 아름다워 그를 어찌 박대한대도 사랑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다. 하사품으로 가치를 다했고 군신의 유대는 그 결혼으로 가치를 다했으니, 나머지는 손에 쥔 어린 이카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모르간 르 페이는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몸서리치는 염오감을 견딜 수 없었다.
1-1.
그 이카본은 호문쿨루스 이카본처럼 어렸을 때 병약해서 거의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던 유년을 보냈을 거고…… 우서 펜드래건이 자기 충신의 외아들이 그리 병약하다는 거 알았을 때 휘하의 궁정마술사란 마술사는 죄 왕진 보내서 애 신체 재구성시키고 고쳐주는 것으로 충심에 대한 보답을 했다면…… 범인류사의 모르간은 그를 싫어하지 않는 게 힘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판 남의 자식은 그리도 아끼는 부친이 친자식인 나는.
여기서 사고가 더 나가지 못하는 십대 중반의 모르간 남보다 못한 친자식이란 꼬리표를 지우지 못하는 모르간
그냥 그녀가 어느 날 성적인 맥락 전혀 없이 잠든 이카본 셔츠 뜯어서 몸에 남은 마술의 흔적이랄지 수술 흉터에 가까운… 희미하게 바랜 것을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는 게 보고 싶다고 몸에 남은 흉은 자라며 씻은 듯 사라지겠지만 모르간의 눈에 남은 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2.
모르간의 손을 제 뺨에 대고선 당신께 달려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라고 말하는 십대소년 이카본
그리고 그 남편이 정말이지 진절머리나게 싫은 범몰간…
1-3.
범인류사의 모르간이 우서의 명으로 어린 이카본과 결혼하라고 했을 때 느꼈을 폭력성과 치욕은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없다면 그와 혼인하라’ 가 아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대도 그와 혼인하라’고 말한 우서 펜드래건의 존재 자체였을 것이다

 

 

신처럼 걷고 계명성처럼 말하는 이에게

 

1.
그녀는 매력적이고 교활하다. 그리고 그 눈은 인간의 표층부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파편 하나 남기지 않고 읽어낼 수 있어서, 상대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조립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범인류사의 브리튼에서, 이카본은 모르간을 그렇게 판단했다. 그 어느 날엔가 모르간이 이카본의 입술을 손끝으로 건드렸다가 픽 비웃는 얼굴을 볼 때면 이카본은 모르간의 눈에서 가벼운 아쉬움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부모가 온 정성을 다해 키워낸, 단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아들. 그의 천성은 그녀의 친밀하지만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은 동족이 될 수도 있었음을 품고 태어났음을 이카본은 모를지언정 모르간은 알았을 테니.
나면서부터 악하기로 정해졌던 것이 그리도 선한 모습을 보이며 행복해하는 모습이란 그녀에게 얼마나 심기가 뒤틀리는 일이었을지.

2.
아아 나는 허무하고 요염하며 제 빼어난 혜안을 모략 같은 은밀한 유희에 낭비적으로 살라버리는 범인류사의 모르간 르 페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근대소설풍으로 읽어주기를 바라는 문장처럼, 마침표를 찍지 않고.

3.
나 살짝 범몰간 까마귀 기질 있는 거 좋아하는 것 같음… 반짝거리는 거 모으는… 전형적인 에메랄드컷으로 커팅한 에메랄드 반틈 정도 이에 물고서 해죽 웃는… 침대에서 엎드린 채 나를 보는 범몰간 같은 거
근데 잇새로 그렇게 물 정도로 큰 에메랄드면 댑따 비싸겠지 왕비님은 부자네에~…

 

 

상아탑의 현자로부터

 

1.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이카본 짝녀 모르간인 건 아서왕도 알고 멀린도 알고 그냥 카멜롯에서 모르면 너 색슨족 간첩이지 수준인데 원탁에 몰관 자식(특:자기 엄마 싫어함) 비중 너무 높잖아
현자님 강론 지겹습니다 첫사랑 얘기해주십시오
어머님 얘기 듣기 싫으면 입 닫으세요~
이런 거냐고

2.
상아탑… 이라는 말의 실질적 함의는 속세를 떠난 예술지상주의자 또는 학문에 빠진 몽상가를 점잖게 이르는 비유였고 실제 상아로 이룬 탑은 아니었는데, 이후 대학의 하얀 건물이 상아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해서 대학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는 게 정말 취향이었다. 상아탑이라는 말에 이제껏 사람들이 쌓아올린 함의 전체가. 브리튼에서 이카본의 경우는 실제로 상아로 이룬 탑에 틀어박힌 경우지만.
이카본의 상아탑은 그렇다고 진짜 코끼리 상아를 공수해온 건 아니고 마술로 주조한 상아로 만든 거지만…… 범인류사의 모르간도, 이문대의 모르간도 이카본이 세운 상아탑을 볼 때면 다소 시니컬하게 평하겠지.
평생 부족함 모르고 살아온 현자나 탑 전체를 상아로 세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흰 상아탑은 곧 연찬하는 자의 허영심 아니겠는가.

3.
이카본의 상아탑은 진짜 상아를 깎아다 만든 탑이 아니라 마술로 구현한 상아탑이었으니 시일이 갈수록 그 현자의 상아탑이 진짜였다 비유였다 옥신각신했을 것 같기도 하고…….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캄란으로 인해 브리튼이 멸망한 연후에도 어째서 신비의 가장 큰 산물인 상아탑을 해체하지 않고 거기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자신이 혼을 아메지스트 상자에 수납해 스스로 죽기 전까지 상아탑이 남도록 처리할 만큼 애정을 보이는 연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이카본은 오랫동안 땅끝의 오크니 쪽을 보다가 망설이면서 대답한다.
“나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