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쇼틀랜드, 2021.

서울 전체가 하필 블위 개봉할 때쯤에 확진자고 폭발하는 바람에 VOD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며칠 늦게 본 영화였는데, 그래도 역시 영화관에서 보는 게 좋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잘 뽑힌 오락영화였다. 보고 나오면서 정말로 이게 스칼렛 요한슨이 마지막으로 찍은 마블 무비야? 속편 안 나와...? 싶을 만큼 좋았다.


나는 마블 무비를 전부 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어느 쪽인가 하면 나는 마블보다는 DC 쪽이기도 하고, 유구하게 영웅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히어로 무비에 열광하지도 않으니까. 메인스트림인 어벤저스 영화는 안 보고 관심 있는 히어로들의 솔로 무비만 몇 편씩 골라서 보는 편인데, 그도 그럴 게 나는 아이언맨이랑 캡아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갈등을 벌이고 봉합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데 얘네 둘한테 관심이 없어버리면 메인스트림 무비 러닝타임 중 한 7할 가량은 그냥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되니까... 마블이 원체 솔로 무비로도 유입이 되는 걸 상정하고서 만들다 보니 솔로 무비만 봐도 대강 메인스트림 서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파악할 수 있게 만든 게 다행이었고, 그게 이번 블위 솔로 무비에서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블위는 엔드게임으로 마무리된 3페이즈를 접고 4페이즈의 첫 번째 영화인데, 그보다는 이 영화가 3페이즈의 마지막 영화고 파 프롬 홈 쪽이 4페이즈의 첫 번째 영화라고 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파 프롬 홈은 엔드게임 끝나고 난 후일담에서 4페이즈 프롤로그를 보여주고 있다면 블위는 아예 시점 자체가 시빌워 직후라서 이제까지 진행되었던 메인스트림의 외전격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래도 전술한 바와 같이 솔로 무비로도 유입이 되는 걸 상정하고 제작되다보니 시빌워 내용이 기억이 안 나거나 안 봤더라도 그다지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도 그냥 한 십분 정도 더 보고 있으면 알아서 영화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도록 설명을 다 해준다. 구태여 대사로 그래 우리 무슨 일이 있었지~ 같은 지겨운 시퀀스가 없어도 대강 파악을 다 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나처럼 가볍게 보고 가볍게 잊는 라이트팬층한테 가장 크게 어필되는 장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특히 초반부의 미장센을 보면서 생각한 거지만 미국은 정말 러시아... 정확히 말하면 소비에트의 잔재 같은 것들을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블위 원본 캐릭터 설정부터가 와... 정말 러시아의 마이너스 덕질이 아니고서야 이런 설정 못할 텐데 싶긴 했다. 히어로 코믹스가 한동안 프로파간다적인 면모가 있었다는 거야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영화의 미션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죽은 줄 알았던 드레이코니프를 다시 확인사살하는 거고, 또 하나는 화학적으로 세뇌된 위도우들의 세뇌를 해독제를 갖고 풀어주는 것. 결국 두 미션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진 않은데, 세뇌가 어떻게 풀리는지를 영화에서 처음 제시해줬을 때는 후자의 미션을 그 많은 위도우들한테 언제 일일이 쏴주고 있나 싶었다. 그런데 뭐... 때 되니까 알아서 단체로 잘 풀어주더라. 마블 무비는 생각을 안 하고 봐도 돼서 좋다.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뭘 보여줄 거고 미션을 어떻게 달성할 건지 보여준다...
초반부터 제시되었던 미션들은 모두 샛길로 빠지지 않고 차근차근하게 달성을 향해 간다. 그래서 액션적으로 즐거웠고, 늘 좋아하는 추격전 파트도 성실하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일'에 충실하다. 그러나 서사적으로는 이 미션으로 직진하는 길에서 핍진성이 잘 붙었는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대표적으로 나타샤의 가족이라는 점이 그렇다. 나타샤가 오하이오의 3년을 보냈던 위장 가족과 다시 레드룸을 처단하러 가는데, 문제는... 음... 정말 이 부모가, 특히 어머니 역할을 했던 멜리나가 나타샤에게 협조를 할 만큼 나타샤에게 어떤 애착이 있었나? 혹은 레드룸을 미련없이 배신할 만큼의 사유가 있었는가?의 부분에서는 의문을 남긴다.

알렉세이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헛소리 하는 인물이고 그다지 생각의 깊이가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그냥 퉁치고 넘어가도 될 만한 합당한 사유도 있다. 그는 반동인물로 찍혀서 토사구팽당했고, 레드룸에게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멜리나는, 최근까지도 레드룸에게 협조해서 일을 해왔고, 이를 '쳇바퀴 도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사를 하는데 어느샌가 위장 가족을 형성했던 인물들과 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레드룸 파괴에 협조한다. 멜리나의 심경을 유추할 수 있는 장면은 나타샤가 애착을 가졌던, 그러나 멜리나가 챙겨오지 못하게 했던 가족앨범을 멜리나가 사실 챙겨와서 간직하고 있었다는 장면뿐이다. 사실은 그녀 또한 애착을 가졌고, 오하이오를 떠날 때 나타샤에게 '미안하다'라고 언질을 주었을 만큼 나름의 미안함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크게 와닿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이게 알렉세이에 대해서도 그렇고 어떤 감정을 할애하고 있다고 추측은 되는데 앞서 제시한 멜리나라는 사람의 주된 심경에 대해서 얼마나 반박이 되는지는 잘 설득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알렉세이가 헛소리하는 지분을 조금 줄여서 단 5분 만이라도 멜리나라는 사람의 단면을 더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이 할애되었더라면 음? 싶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전개적인 개연성에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으면 하게 되는 즐거운 영화였다. 어떻게 해도 속편이 나올 수 있는 결말이었는데 이걸로 스칼렛 요한슨이 하차하니까 앞으로는 못 보겠지 싶어서. 그게 아니면 블위 배우가 교체되면서 새로 나오려나.

블랙 위도우

2021. 7. 22. 09:52

myo